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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화 소설 <홍로> ⓒ이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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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화 소설 <1화>
그가 대학 동창들과 함께 홍로를 따러가자고 했을 때 그녀는 식탁과 냉장고 사이에서 멈춰 섰다. 그녀는 마늘장아찌가 담긴 반찬 통을 들고 있었는데 반찬을 꺼내려고 했던 것인지 아니면 냉장고에 집어넣으려고 했던 것인지 순간 헛갈렸다. 동창이라는 단어가 그녀를 놀라게 했다. 그가 친구들의 모임에 그녀를 데려가겠다고 한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그녀는 식탁을 흘끗 쳐다보고 식사가 다 끝나가는 시점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에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녀는 그가 친구들에게 자기를 보여주는 것을 부끄러워한다고 생각했었다. 그건 사실이기도 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그녀를 어떻게 소개해야 하는지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와 함께 그의 집에 살고 있고 아내가 하는 모든 역할을 다 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아내가 아니었다. 아내가 아니라는 것은 법적으로 그렇다는 뜻이다. 그녀는 아내의 역할을 하고 그는 그 대가로 그녀에게 돈을 주고 있다. 함께 사는 조건으로 한 달에 200만 원씩을 준다. 물론 생활비를 제외한 금액이다. 그의 재산에 비하면 200만 원은 그리 큰돈이 아니었지만 그녀에게는 제법 많은 액수였다. 그녀에게도 자신에게도 나쁘지 않은 거래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들이 만난 곳은 백화점이었다. 그는 머플러를 교환하려고 백화점에 갔다가 행사장에서 그녀와 마주쳤다. 머플러를 팔고 있던 그녀가 이번에는 똑같은 곳에서 양말을 팔고 있었다. 사정을 설명하자 그녀는 행사 기간이 끝났으니 본 매장으로 가라고 했다. 다음 달에 그녀는 역시 같은 곳에서 액세서리를 팔고 있었다. 그는 선물용으로 브로치를 하나 골라달라고 한 뒤 포장을 부탁했다. 그리고 직원용 출입구에서 그녀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브로치를 내밀었다. 그로부터 두 달쯤 지났을 때, 그러니까 그들이 여섯 번째 데이트를 하던 날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아내 역할’을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결혼을 생각하지 않은 이유는 단순했다. 그녀가 자신의 아내감은 되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녀는 중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고 휴대전화를 팔아서 밥벌이를 근근이 이어나가는 외동아들을 두고 있었다. 젊었을 때 작은 건축 사무소에서 잠시 경리 일을 하다가 스무 살에 결혼을 했는데 이후로는 직업을 가진 적이 없었다. 5년 전 남편과 사별한 뒤 백화점에서 일용직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월세를 제하고 보험료를 붓고 남은 돈으로 생계를 꾸려갔다. 아들이 가끔 목돈을 요구했기 때문에 저축한 돈은 따로 없었다. 처녀 시절이 지난 뒤에는 극장에서 영화를 본 적이 없었고 치마를 입어도 스타킹 대신 흰 면양말을 신었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 대해 불만스러워하지 않으며 닥치는 일을 불평 없이 처리해나갔다. 일을 쉬는 날에는 집에서 텔레비전을 봤다. 휴먼 다큐멘터리나 옛날 가수들이 나오는 콘서트를 좋아했고 옷을 잘 차려입고 나오는 여당의 의원들을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점심 식사를 마치면 주방 식탁에서 믹스커피를 마시며 〈좋은생각〉 같은 잡지를 읽었다.
반찬 솜씨가 훌륭하다는 것은 최고의 장점이었다. 말이 없고 순종적이어서 조금 지루할지언정 남을 귀찮게 하지 않았다. 백화점에서 고객을 응대했기 때문일까, 싹싹함이 몸에 배어 있었는데 그건 후천적으로 습득한 것으로 보였다. 그녀는 자기가 나서야 할 때와 끼어들어야 할 때를 정확히 구분하고 있었고 살짝 주눅이 든 태도는 자기 인생에서 황금기는 전혀 없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쉰 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삶이 완벽하게 실용적인 것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마치 태어날 때부터 50대였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50대처럼 걸었고 50대처럼 웃었고 50대처럼 잠자리를 했다. 그녀의 그런 면 때문에 그가 그녀를 선택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녀의 그런 면 때문에 그가 그녀와 결혼까지는 할 생각이 없었는지도 몰랐다. 같이 사는 데는 나쁠 것이 없었으니까, 같이 살기만 하는 것이 좋다고 그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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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화(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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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화
1979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2012년〈창작과비평〉신인상에 단편소설〈팜비치〉가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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