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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4.22 09:36 수정 : 2014.05.13 14:55

최정화 소설 <2화>



그녀를 집으로 들인 뒤 그는 더 이상 데이트를 하지 않았고 선물을 하는 일도 없었다. 200만 원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었으니까. 생일이나 명절이 낀 달에는 20만 원씩을 더 쥐여주면 그만이었다. 그러니까 이번 무주행은 그야말로 2년 만의 선물이요, 외출인 셈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녀에 대한 동정심이나 배려에서 나온 게 아니었다. 순전히 그의 자존심 문제였다. 애초에 그녀를 무주에 데려가겠다고 한 것은 대진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면에서 아쉬울 게 없는 그였지만 결혼한 지 2년 만에 아내가 죽고, 이후로 내내 혼자 지내는 것을 친구들이 안타까워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중 대진은 유독 그의 독신 생활에 대한 관심과 염려가 컸다. 더 이상 그런 시선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이번 모임에 그녀를 데려간다면 자신이 평범하게 보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그녀를 모임에 데려가기로 결정하자 그녀가 죽은 아내에 비해 부족한 점이 많은 것 같아서 찜찜했다. 30년 전에 사고사한 아내는 그의 머릿속에서 여전히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이제 쉰 살이 된 그녀와 비교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한 처사였지만, 그는 그녀의 어딘가가 분명 거슬렸다. 화분에 물을 줄 때 허리를 굽히는 각도며 치매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며 눈을 감은 채 설거지를 하는 모습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진 휴지를 주울 때 무릎을 벌리고 앉는 걸 보고 그는 대단한 것을 발견했다는 듯 안경을 고쳐 썼다. 유심히 관찰한 결과, 그는 마침내 그녀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촌스러움이라는 악덕을 발견해낼 수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백화점에서 그녀에게 선물할 옷 한 벌을 샀다. 주황색 꽃무늬가 프린트된 갈색 등산복이었다. 등산복과 어울리는 색의 운동화도 한 켤레 골랐다. 쇼핑백을 식탁 위에 내려놓으며 그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친구들에게는 최근에 만난 여자라고 해뒀다, 그 애들은 우리가 같이 살고 있는 줄은 모르니 그렇게 알아두라고 말했다. 그는 노파심에 몇 마디 덧붙였다.

“실수가 없으려면 말수를 줄이는 것이 좋지.”

“네.”

“그냥 묻는 데만 대답하라는 거야. 평소 당신이 하던 대로.”

“알아들었어요.”

그녀의 짤막짤막한 대답이 그는 마음에 들었다. 차분하고 건조한 낮은 톤의 목소리도. 그는 목소리로 성격을 점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그가 들어본 여자의 목소리 중 가장 낮은 톤이었는데, 그에게 저음의 목소리는 쾌락에 무디다는 것을 뜻했다. 그의 연애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대 목소리 톤이 높은 여자들은 즐거워지기 위해 끊임없이 뭔가를 했다. 전화로 한 시간도 넘게 수다를 떨거나,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이것저것 사들이거나, 머릿결이 상할 때까지 머리카락 색깔을 바꾸거나. 그렇게 애써 기분을 들뜨게 만들어놓은 뒤에 그녀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해야 다시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막기 위해 또 다른 친구에게 전화를 거는 것. 방금 했던 이야기의 전개 부분을 조금 변형하여 되풀이하고, 쇼핑한 물건을 교환하거나 환불하고, 머리카락 색깔 대신 이번에는 미용실을 바꾸는 일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기분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혹은 그녀의 기분이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거나. 쇼핑백을 열어 안에 든 것을 확인한 그녀는 등산복을 입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장롱 안에 넣었다. 고작 나일론으로 만든 바지 한 벌에 몇십만 원이나 한다는 사실에 혀를 내둘렀을 뿐이었다. 나일론이 아니라 고어텍스라고 그가 정정해주었을 때, 그녀는 다시 낮은 톤의―그에게 평온을 가져다주는―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말 고마워요.” 대화는 언제나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재의 예문처럼 끝이 났다. 그녀는 장롱 서랍을 닫은 뒤 베란다로 가서 구부정하게 등을 구부리고 유칼립투스 나무에 물을 주었다. 그는 안경 너머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콧등을 살짝 찡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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