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화 소설 <5화>
창밖으로 개발이 덜 된 시가지가 지나갔다. 대부분의 건물이 1층짜리였고 간판에는 뽀얗게 먼지가 앉아 있었다.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분홍색, 자주색, 하얀색의 꽃잎을 단 채 줄기를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는 팔꿈치로 그녀의 옆구리를 슬쩍 건드렸다. 그녀가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는 창밖을 가리켰고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은 꽃을 향해 있었지만 눈빛의 끝 간 데는 허공에 닿아 있었다. 차가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의 어깨에 한 번 부딪혔다가 다시 창문에 한 번 부딪히며 몸을 흔들어댔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그의 눈에는 가련한 코스모스처럼 보였다.
사과 농장에 도착한 것은 정오가 훌쩍 지난 시각이었다. 산 중턱이라 날씨가 쌀쌀했다. 안개가 낮게 깔려 있었다. 고랭지 특유의 습기인지도 몰랐다. 축축한 공기가 얼굴에 머리칼에 옷 위에 달라붙었다. 그는 허리춤에 묶었던 점퍼를 입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얀 석회 가루를 뒤집어쓴 붉은 열매가 가지마다 탐스럽게 달려 있었다.
그녀는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말을 붙여도 심드렁하게 대꾸했고 눈앞에 끝없이 펼쳐진 사과나무 밭 앞에서도 감탄하지 않았다. 나란히 걷다가도 뒤처지기 일쑤였다. 그가 옆에 있다는 사실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생각에 잠긴 채 묵묵히 걷기만 하던 그녀가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듯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는 정면으로 고개를 들고 그를 앞질러 걷기 시작했다. 그녀가 발걸음을 멈춘 곳은 대진의 옆이었다. 그는 그녀의 뒤에 바싹 붙어 섰다. 그녀가 대진의 어깨를 손가락 끝으로 두드렸다. 대진이 고개를 돌리고 눈을 크게 뜨며 무슨 일인지 얘기해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얼굴에 홍조가 돌았다.
“저희 아들 말이에요.”
“아, 그 과학 선생님이시라던?”
“스승의 날이 되면 그 애는 엄청난 것들을 가져온답니다. 인기가 아주 좋거든요.”
“엄청난 것들이란 게 뭐죠?”
대진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어떤 학생은 아들에게.”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음, 그러니까, 인형 같은 걸 줘요. 인형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큰 인형이에요. 사람이랑 크기가 거의 비슷한 것도 있어요.”
대진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으나 그녀는 그의 얼굴까지 살필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돌아왔다. 평소 그녀의 시선은 대개 바닥을 향하고 있어서 눈을 반쯤 감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지금 그의 앞에서는 동그랗게 눈을 뜬 그녀가 눈동자를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몸이 떨렸다. 단언컨대 그건 불안감이 아니라 흥분 때문이었다. 그녀는 누가 묻지도 않는 것들에 대해서 떠들 준비가 다 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상기된 얼굴은 그녀가 쉰 해를 살아오는 동안 거짓말을 해본 적이 없었다는 증거였다. 오늘은 그 기록이 깨진 날이었다. 첫 경험이 그녀에게 강렬한 쾌감을 준 것은 거의 확실했다. 그녀는 수줍으면서도 어딘가 교태 어린 미소를 띠고 그의 팔짱을 꼈다. 몸을 살짝 기울여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고, 전에는 자기가 먼저 그런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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