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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4.28 10:07 수정 : 2014.05.13 14:57

최정화 소설 <홍로> ⓒ이현경



최정화 소설 <6화>



“와, 꽃사과나무예요. 사진으로만 봤었는데.”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그가 멈춰 선 건 그녀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꽃사과나무에 감탄해서도 아니었다. 다리가 딱딱하게 굳어버린 것 같았다. 분명히, 그녀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다섯 음 정도 높았다. 평상시 그녀의 목소리가 ‘도’ 음이었다면 지금 그녀의 목소리는 ‘솔’이었다. 그리고 ‘솔’은 그녀의 목소리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음이었다. 그는 나무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녀가 전에 그 나무를 본 적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그녀가 평소와는 다른 톤으로 얘기하고 있다는 것만이 마음에 걸렸다.

이제 그녀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사과를 따면서도 쉴 새 없이 떠들어대었다. 그는 관자놀이에 통증을 느꼈으나 분위기를 맞추기로 했다. 말을 줄이는 게 좋겠다는 충고로 그녀를 제지할 수 없었다. “이거 어때요? 겉은 울퉁불퉁하지만 분명 단맛 하나는 끝내줄 것처럼 보이지 않아요?” 그의 눈앞에 불쑥 홍로 한 알을 들이밀고 그녀는 깔깔댔다. 그는 하이 톤의 웃음소리가 낯설었지만 그녀를 따라 웃는 척해야 했다.

그녀는 한껏 들떠 있었고 오늘 처음 만난 그의 친구들이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그녀는 여자들과도 잘 어울렸다. 쉽게 웃음을 터뜨렸고, 한번 웃음을 터뜨리면 눈물이 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웃음소리는 높은 ‘레’였다. 그는 귀를 곤두세우지 않아도 앞쪽에서, 뒤쪽에서, 오른쪽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의 주인을 정확하게 찾아낼 수 있었다.

학찬의 부인이 눈썹을 추켜올린 채 그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자기, 저 여자한테 술을 먹인 거야?”

“뭐?”

“대낮부터 술을 마시게 하다니.”

학찬의 부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가 변명을 하기도 전에 학찬의 부인은 뒤돌아 가버렸고 어느새 그녀가 홍로가 가득 담긴 광주리를 끌고 나타났다. 뒤쪽에서는 대진이 돗자리에 앉아 농장 주인이 내놓은 사과즙을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대진을 발견하자 흡족한 미소를 띠며 돌아섰다.

“아들한테 한 상자 보내려고요. 시험 감독을 하느라고 지쳤을 테니까.”

그녀가 대진의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여자 친구 것도 보낼까 생각했는데 괜한 오지랖이지 싶어요. 아직 둘 다 나이가 어리니까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기도 하고요.”

“여자 친구도 선생님?”

“학교에서 만났으니까요.”

이제 막 알에서 부화된 올챙이에게서 삽시간에 뒷다리와 앞다리가 차례대로 나고 그 즉시 꼬리가 줄어들어, 한 마리의 개구리가 울음주머니를 부풀리며 개굴개굴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는 관자놀이가 죄어오는 듯 아팠다.

“우리 때야 그렇지 않았지만 요새는 교사 되는 게 고시 보는 거랑 맞먹는다는데. 시험은 몇 번째에 붙었어요?”

교사가 되려면 임용고시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그녀가 모를 거라는 생각이 들어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저기 저건 어때 보여?”

그는 나뭇가지 안쪽에 달린 큼지막한 사과를 가리켰다. 그녀는 그가 가리키는 쪽으로 움직였다. 그는 자신이 적절한 시기에 끼어들었다고 안도하며 가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사과는 가지에서 쉽게 떨어졌다.

광주리에 담은 사과를 박스에 옮기고 택배 송장에 주소를 적었다. 그들의 몫이 한 박스, 그녀의 아들 몫이 한 박스였다. 송장에는 삐뚤빼뚤한 글씨체로 박형수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이름 앞에서 그는 잠시 멍해졌다. 박형수. 전남편의 성씨가 박가였구나. 그녀는 그 앞에서 남편의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아들과 통화하는 것도 본 적이 없었다. 결혼은 했나? 아니요. 뭘 해 먹고살아? 휴대전화를 판다고 그랬어요. 몇 살이라고 그랬지? 스물일곱이에요. 묻는 것에 대한 답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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