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화 소설 <8화>
그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제야 반찬들이 맛깔나게 보였다. 그는 여유를 되찾고 식사를 즐기기 시작했다. 나물을 적당히 덜어 그릇에 넣고 밥알을 고추장에 살살 비볐다. 그녀도 조용히 그릇을 비우고 있었다. 거짓말의 임무에서 벗어난 그녀는 한결 느긋하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가 그릇을 반쯤 비웠을 때, 마주 앉은 영식이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는가?”
그는 지금 막 삼킨 밥 한 숟갈이 그대로 목구멍에 걸린 기분이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백화점의 행사 판매원으로 일했던 것이 어떤 일인지 모르겠으나 그에게는 그녀의 이름인 이용순이나 아들이 휴대전화 판매원으로 일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는 그녀의 눈치를 보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쳤을 때 재빨리 눈을 찡긋했다. 거짓말을 해도 좋다는 신호였다.
“평소에는 늘 아들과 함께 쇼핑을 하는데 그날따라 혼자 나들이를 했지요. 가을이 다가오고 있어서 머플러가 하나 필요했던 거예요.”
그녀가 이야기를 꾸며대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이제 더 잘할 수 있었다. 힘을 들이지 않고도 말을 술술 풀어냈다. 그녀는 수저질을 멈추지 않으면서 방금 있었던 일을 얘기하듯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난 점원이 권한 베이지색 머플러를 살피는 중이었는데 이이가 그 색깔보다는 자줏빛이 좋겠다고 조언했답니다. 우습지 않아요?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머플러를 추천하다니요. 당연히 난 그때 이이가 나한테 관심이 있다는 걸 눈치챘고요.” 그녀는 거기까지 말하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가 자줏빛 머플러를 권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듯 살짝 고개를 숙이고 미소 지었다. 그녀는 행복해 보였다.
그는 그녀가 왜 행복한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자기가 한 말을 믿고 있었다. 그게 그녀가 다섯 음이나 높은 톤으로 말을 하고, 그토록 웃음이 많아지고, 그리고 거짓말을 계속하고 싶어 하는 이유였다. 그녀는 지금 어엿하게 제 앞길을 닦아나가는 장성한 아들을 두고 있었고 우연히 마주친 남자의 관심을 받을 만한 요조숙녀였다. 게다가 생전 처음으로 남에게 주목을 받고 있었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 그녀를 궁금해했고 그녀는 그들을 만족시키는 대답을 할 수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더 이상 미안해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즐거워 보이는 게 아니라, 즐거웠다.
“이이가 색감 하나는 정말 뛰어나긴 해요.”
그녀는 컵에 물을 따랐다. 입안을 물로 헹구고 나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그녀가 그의 연인이 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가 불쌍하게 혼자 늙어가고 있다고 동정하지 않았다. 그의 계획은 완전히 성공했다.
“아들내미 다 키워 선생 만들어놓았겠다, 이제 더 신경 쓸 것도 없을 텐데 뭐가 걱정이야? 제2의 인생을 시작하라고. 타이밍이 딱이야, 딱!”
형식이 밥알을 문 입을 우물거리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는 어색하게 웃었다. 누군가가 소주를 시켰다. 누군가가 대낮부터 무슨 술이냐고 핀잔을 주었고 이렇게 모여 나들이를 온 게 몇 년 만인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라고 또 누군가 대답했다.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친구들과 뿔뿔이 흩어지고 난 뒤 그들은 택시 승강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는 그들 사이의 무언가가 변했다고 느꼈다. 그녀와의 거리가 자신이 원치 않을 만큼 가까워졌다는 느낌이었다. 그가 머플러의 자줏빛 색깔 운운하며 그녀에게 진짜로 추근댔고, 그들이 동등한 관계로 교제해왔고, 어쩌면 결혼을 앞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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