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화 소설 <9화>
그는 그 생각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이제 아무도 없으니까 편하게 행동하자며 그녀의 팔짱을 풀었다. 그녀는 좀 서운해하는 것 같았지만 뭐라고 대꾸하지는 않았다. 친구들과 헤어지자 그녀는 다시 예전으로, 특색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특색이었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래도 꺼림칙한 기분에서 쉽게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는 괜히 두세 걸음쯤 앞서 걸었다.
불안한 마음이 사그라지자 심술이 났다. 어쩌면 여전히 불안했기 때문에 정확히 선을 긋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돈 얘기를 꺼낼 생각이었다. 그들 사이를 확인해주는 것은 언제나 돈이었고,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얼마가 좋을까? 생일이나 명절 때처럼 20만 원이 적당할까? 기분도 찜찜한데 10만 원쯤 더 얹어주는 것은 어떨까?
“30만 원 정도면 괜찮겠지. 오늘 자네 수고비 말이야.”
그는 그로써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밧줄에서 완전히 풀려난 기분이었다. 속이 다 시원했다. 그녀가 자신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모르지만 그녀에게 복수를 한 것 같이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소리 내어 크게 웃고 싶을 지경이었다.
“저도 좋은 구경을 한걸요, 뭘.”
그는 그녀의 대답을 듣는 둥 마는 둥 보도블록 끝에 서서 손을 들었다. 택시가 멈춰 섰고 그녀가 먼저 올라탔다.
“멀리 다녀오시는 길인가 봅니다.”
사과 박스를 보고 택시 기사가 말을 걸었을 때 그는 무주에 갔다 왔다고 짧게 대답했다. 기사는 잘 봐줘야 서른 살 정도로 보였고 택시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손님들이 자기와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자꾸만 뒤쪽을 흘끗거렸다. 그는 택시 기사의 눈에 그들이 부부로 보일 거라는 생각 때문에 기분이 나빴다. 30만 원으로 상황을 겨우 정리한 참인데 지금까지 그의 인생에서 아무런 상관도 없던 젊은 녀석이 하필이면 이 순간에 끼어든다는 게 짜증 났다.
“부인이 미인이시네요. 젊었을 때 남자들이 꽤나 따라다녔을 것 같은데요.”
기사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고 그녀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으며 배낭에서 작은 거울을 꺼내 얼굴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파우더 뚜껑을 열고 땀으로 지워진 부분에 하얀 분을 덧발랐다. 그는 기사가 뒷좌석에 앉아 있는 중년 여자의 젊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쓸데없는 상상을 하는 대신 차선을 지키고 신호등을 살피고 앞차와의 간격을 유지하는 데나 신경 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는 창문 쪽으로 좀 더 붙으며 그녀와 떨어져 앉았고 양손을 겨드랑이에 끼워 넣고 어깨를 움츠렸다.
다행히도 기사는 그녀에게 그 이상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사거리를 지날 때쯤 기사의 아내가 전화를 걸었기 때문이었다. 기사는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했는데, 아내는 어젯밤에 상갓집에서 밤을 새웠다는 것이 거짓말이 아니냐고 운전 중인 남편을 들볶았다. 기사는 손님이 있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아내와 말다툼을 벌였다. 아내가 기사에게 욕설을 내뱉은 순간 기사는 신호를 놓쳤고 결국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그가 앞좌석의 시트에 얼굴을 세게 부딪쳤다. “그러니까 안전벨트를 맸어야지요.” 그녀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애매한 표정으로―사실을 얘기하자면 그녀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나지막하게 말했다. 기사는 얼굴이 시뻘게진 뒷좌석의 승객에게 정중히 사과해야 했고 전화를 끊은 뒤에는 조용히 운전에만 몰두했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때 그가 먼저 택시에서 내렸고 그녀는 카드 승인을 기다리느라고 차 안에 좀 더 머물렀다. 카드를 돌려받은 그녀는 차 문을 열려다가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문고리를 잡았던 손을 놓고 기사가 앉은 좌석 뒤쪽으로 옮겨 앉았다. 그리고 몸을 앞으로 기울여 택시 기사의 귀 가까이에 대고 입술을 달싹였다.
“젊었을 때는 저 양반이 훨씬 신수가 훤했지요. 같이 다니면 내 얼굴은 보이지도 않았으니까. 그런데 집 장만한다고 고생을 많이 했어. 지금 저이 얼굴을 보면 그때 내가 너무 빡빡하게 군 건 아닌지 후회스러울 때가 있다우.”
물론 먼저 내린 그에게는 그녀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택시에서 내렸을 때 그는 길 건너편 주차장에서 길고양이 한 마리가 트럭 밑으로 기어드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시트에 부딪친 이마가 아직까지 얼얼한지 그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들은 밤거리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둘은 영락없는 부부로 보였다. 혈기왕성한 아내와 어딘가 주눅이 들어 있는 남편으로. 그녀의 걸음걸이가 달라졌다는 걸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평상시에는 구부정했던 등을 곧게 펴고 있었고 목을 어깨에 파묻듯 움츠린 모습은 간데없이 턱을 치켜든 채였다. 느릿한 걸음 대신 보폭이 좁고 빨라졌다. 그녀는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50대의 허물을 마침내 벗어던진 것 같았다.
(이상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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