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하다.
환한 갯벌 저 끝에서 일렁이는 투명한 물빛.
빠져나가는 중일까, 들어오는 중일까.
작고 마른 내 몸을 쓰다듬는 따스한 햇볕.
저쪽으로 걸어갈까, 이쪽으로 돌아설까.
은은한 향기처럼 바람이 분다.
신기하지, 참 신기해.
이토록 멋진 곳에 오직 나뿐이라니.
눈을 뜬다.
문을 본다. 여전하다. 마음을 놓는다. 이불 위에 드러누워 천장만 쳐다보고 있기를 한참. 극단으로 가닿는 생각들. 팀장의 옳은 말들. 옳아서 화가 나는 말들. 미래는 중요하다. 일을 해야 한다. 여기 갇혀 있으면 안 된다.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애써야 한다. 문밖에 버티고 선 벽이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하더라도 깨부수고 나가야 한다. 대결하고 극복해야 한다. 그러면 모두들 박수 쳐줄 것이다. 나는 훌륭한 사례가 될 것이다. 누군가는 인간 승리라는 표현을 쓸지도 모른다. 내게 독한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겼다고도 하겠지. 나는 그것을 바라나? 인간 승리를? 자기와의 싸움을? 나가고 싶은가? 남들처럼 살고 싶은가? 지금 이곳을 견딜 수 없는가? 견딜 수 없기는 바깥도 마찬가지다. 이곳에서나 바깥에서나 망가지고 망한다. 이곳은 끝내 나를 파멸시킬 수도 있지만, 당장은 나를 살게 한다. 이러다 죽어도 상관없다. 죽어도 ‘좋다’가 아니다. 이것은 선택인가? 문자 수신음이 울린다.
수리공을 보냈어. 그의 도움을 받아.
액정에 찍힌 두 문장을 읽고 또 읽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통화 연결음만 울리다가 끊긴다. 문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돌려본다. 열리지 않는다. 수리공이 와봤자 소용없다. 문을 가로막은 거대한 벽 때문에 문을 찾지 못할 테니까. 한참을 서성이고 헤매다가, 문을 열려면 먼저 벽을 부숴야 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도 있다. 수리공은 포기하고 돌아갈 것이다. 팀장이 항의하면 그것은 자기 일이 아니라고 대꾸하겠지. 팀장은 고민할 것이다. 포클레인 기사를 불러야 할 만큼 이 자식이 꼭 필요한 사람인가? 장담컨대 결론은 금방 내려질 것이다. 나는 그 정도로 유능한 직원이 아니다. 내가 하는 일은 나 아닌 다른 사람이라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사실 그렇지 않은 일이 없다. 꼭 나여야만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수리공을 보낸 것만으로도 팀장은 할 만큼 했다. 그 정도로도 충분히 감동적이다. 하지만 팀장은 집요하다. 짜증 수백만 방울을 흩뿌리면서도 주어진 일은 반드시 해내는 사람이다. 그런 모습이 존경스러울 때도 있지만 무서울 때가 더 많다. 팀장이 포기하지 않으면 나도 포기할 수 없으므로, 원치 않더라도 나 역시 집요해져야 했다. 그러니 내가 반드시 필요한 직원이라서가 아니라, 나를 연민하거나 걱정해서가 아니라, 팀장이 포기할 줄 모르는 사람이어서 결국 포클레인 기사에게 연락을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를 안에서 꺼내고 팀장은 만족할 것이다. 보람과 성취감을 느끼겠지. 나를 이대로 내버려두라 아무리 애원하고 소리 질러도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며 기어코 나를 끌어내겠지. 인간다운 게 뭐지? 성실한 거? 끌어내 뭐라도 시키겠지. 수천억 방울의 짜증을 견뎌야 하는, 견디다 보면 어느새 노인이 되어버리고 말 그런 과업을. 나, 정말 요양원에는 갈 수 있을까? 무섭다. 수리공이 이곳을 발견하면 어쩌지? 아주 유능한 수리공이어서 포클레인 기사를 부르지 않고도 문을 열어젖히면 어쩌지? 불안하다. 갇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느끼지 못한 불안과 두려움. 저 문이 열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확연히 알겠다. 정말, 나가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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