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영 소설 <8화>
깨진 벽을 잘게 으깨는 소리. 거대한 짐승이 동료의 뼈를 와작와작 씹어 먹는 듯 끔찍한 소리. 휴대전화 액정에 땀이 맺힌다. 온몸이 흠뻑 젖도록 땀이 흘러 춥다. 바들바들 떤다. 어지럽다. 기관총 쏘듯 기침이 터진다. 구역질이 난다. 겨우 전송 버튼을 누르고 다시 전화를 건다. 통화 연결음만 들린다. 제발 받으라. 받아서 내 얘기를 들으라. 당신은 나를 더 큰 불행 속에 처넣고 있다. 전화가 끊긴다. 다시 적막. 다음은 무엇일까. 이 적막은 무엇을 예고하는가. 전화벨이 울린다.
나야.
이 대리?
사실 나 들었다. 네 얘기.
나는 여기 있다. 여기 있는데 바깥에선 어째서 거기 없는 내 얘기들을 나누고 지랄이지?
근데 나 진작 알고 있었어. 애들 엄마한테 먼저 들었거든. 사람 사는 게 불쌍해 보여 좀 친절하게 대해줬더니 네가 뭔가 오해했는지 자꾸 치근덕거린다더군. 그래서 내가 처신 똑바로 하고 다니라고 화를 많이 냈는데…… 그때 애들 엄마를 믿어줄 걸 그랬나? 하지만 어쩌겠어. 이미 세상 뜬 사람……. 애들 엄마가 꼬리를 쳤든 네가 먼저 치근댔든 그게 뭐 중요한가. 어쨌든 너희 둘, 하긴 한 거잖아? 누구 말이 진짜든 불행하긴 마찬가지지. 이봐, 나도 말 못 할 비밀 많아. 나이 들수록 점점 많아져 마음이 이만저만 무거운 게 아니야. 근데 말이지. 그런 게 쌓이고 또 쌓여 마음이 터질 것 같대도, 그런 거는 철저히 혼자 감당해야 하는 문제 아닌가? 인간적으로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무슨 말인가. 나는 이 대리에게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마음으로만 지껄였다. 미치지 않고서야 내가 이 대리에게, 설마,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그건 그렇고. 팀장이 문을 부수라고 했다며?
잠깐. 오늘 며칠이지? 지금 몇 시지? 아침인가 밤인가 새벽인가.
다들 나오라고 난리지?
모르겠다. 나는 팀장의 독촉만 받았다. 팀장이 전해준 말만 들었다. 그런데 팀장은 왜 나를 꺼내지 못해 안달이지? 정말 걱정되어 그러는 걸까? 왜 나를 걱정하지? 이 대리는 내가 해야 할 일을 대신 잘하고 있을까? 오늘도 팀장과 밥을 먹으며 9시 뉴스를 같이 봤을까? 오늘도 누가 누굴 죽이고 스스로 죽었다는 뉴스가 나왔을까?
네 생각은 어때? 나오고 싶어?
고개를 젓는다.
내 생각도 마찬가지야.
내 고갯짓을 본 사람처럼 이 대리가 말을 잇는다.
나오기 싫으면 나오지 마.
깊은 한숨을 내쉰 후 말을 잇는다.
나와 봤자 다를 것 없어. 여긴 그대로니까. 거기 들어가기 전과 똑같이 살아야 할 거야. 그러고 싶은가? 거기 처박혀 있으면 잠시라도 말이야, 이곳의 불행과 고통을 잊을 수 있지 않나? 애들 엄마 떠났을 때 나도 한동안 그랬지. 애들 생각해서 가까스로 나오긴 나왔는데…… 모르겠어. 뭐가 더 좋은지. 여긴 정말 숨 쉴 구멍이 없다는 거, 갇혀 있다 나오니 더 실감 나더라. 애들만 아니었음 나도 나오지 않고 버텼을 거야. 넌 뭘 원하지? 사람들 말 듣지 말고 너 원하는 대로 해.
진중한 목소리다.
너도 알겠지만 벽은 이미 깨졌어. 문 부수는 거야 시간문제고. 그런데 말이야.
알 수 있다. 이 대리의 충고는 진심이다.
부서진대도 네가 나오지 않으면 그만이지. 안 그래? 문 따위가 무슨 대순가.
전화가 끊기자마자 조용히, 문이 부서진다. 아니, 스러진다. 모래처럼. 신기루처럼. 뻥 뚫린 밖에는 무거운 어둠이 버티고 있다. 밤이었구나. 새벽인가? 기다리면 알게 되겠지. 안다. 이곳에서는 사람답게 살 수 없다. 모르겠다. 사람다운 삶이 대체 무엇인지. 나는 나의 행복과 안락을 원한다. 그것을 얻으려면 사람답게 살아야 하나? 아닌데. 아닌 것 같은데. 사람답게 살 때, 나는 평안이나 위로를 얻을 수 없었다. 걱정과 불안에 휩싸여 살았다. 그렇다면 사람다운 삶이란 걱정과 불안에 잠식된 삶인가? 아니, 사람답게 살아본 적이 있긴 있나? 모르겠다. 나갈 수 없고 나가고 싶지 않다. 아직은 아니다. 가만히 앉아 골똘히 쳐다본다. 문이 있던 자리를. 그곳의 어둠을. 더 어두워질 것인가. 차차 밝아질 것인가. 다음을 기다린다.
세 개의 시곗바늘은 하늘 꼭대기를 가리킨 채 더는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고 외롭고 아름다운 이곳에 주인 없는 햇살과 나뿐인 줄 알았다. 그런데,
발아래서 아주 작은 기척이 느껴진다.
천천히 앉아 가만히 들여다본다.
까만 똥처럼 볼품없지만 그 어느 때보다 내게 가장 가까운 정오의 그림자.
여기 있었구나.
삶.
삶이다.
눈을 뜬다.
문을 본다.
(이상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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