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창간 26년 특집, 떠오르는 환동해]
동진하는 중국, 이에 맞선 러시아
‘탈구입아’ 일본은 대륙진출 노려
철도망 촘촘해지고 송유관도 쭉쭉
한·중·러·일 화물 매년 11.2% 증가
북극항로 가세, 물류흐름 동해로
두만강 삼각지대에서 한중일러 각축
북방 4섬, 독도 등 긴장은 여전
자칫 갈등 진원지로
한겨레신문은 한국해양수산개발원과 공동으로 지난달 4월중순 부터 5월초까지 ‘환동해-변방의 바다에서 동북아협력의 미래라는 주제’에 입각해 환동해 관련 당사국(몽골, 중국, 러시아, 일본)의 움직임을 현지 취재했다. 해양수산개발원 전문가들이 동행한 이 취재를 바탕으로 49~55면에 걸쳐 ‘닫힌 바다에서 열린 바다로’, ‘물류와 에너지 협력의 새로운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동해의 변모를 조망한다.
■ 변방의 닫힌 바다 동해
동해는 변방의 바다였다. 남북의 동해안 지역, 중국의 지린성, 러시아의 연해주, 일본의 서쪽(일본해) 지역이 면해 있는 동해는 각국 주변부의 중첩된 변방으로 존재했다. 일본까지 포함해 거의 대부분이 자국 내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발전과 성장이 지체돼 있었다. 1970~80년대 일본 쪽에서 ‘탈구입아론’(서구 중심에서 벗어나 아시아와 협력강화)이 부활하며 북한을 포함해 중국, 러시아와의 경제협력을 활성화하기 위한 환동해경제권 구상이 있었다. 그러나 구상일 뿐이었다. 일본은 태평양 쪽인 동남부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했고, 남한도 미국과 유럽 등 남쪽의 바다를 통해 성장하고 발전했다. 경남·부산을 벗어나 동해에 면한 경북·강원 쪽으로의 발전은 가로막혔다. 가장 큰 걸림돌은 남북의 분단과 냉전이었다. 동해는 사실상 닫혀 있는 바다였다. 분단은 비무장지대에만 있었던게 아니다. 동해를 갈라놓고 북방으로 가는 길을 막았다. 중·러의 대륙세력과 미·일의 해양세력은 동해를 사이에 두고 서로 분리돼 있었다. 동해는 소통하고 협력하는 열린 공간이 아니라 하나의 경계였다.
■ 탈냉전의 흐름과 지역협력의 맹아
그 냉전의 장벽이 무너지면서 변화가 나타났다. 1990년대 초 한-중, 한-소 수교와 남북 기본합의서로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북·중·러의 협력도 시작됐다. 1991년 유엔개발계획(UNDP)에 의해 추진된 북한의 두만강유역개발계획(TRADP)은 최초의 동북아 경제협력 프로젝트이자 소지역 협력이었다. 이는 1991년 12월 북한의 나진선봉 특구 설치와 92년 중국의 훈춘 국제합작시범구 설치를 배경으로 한 것이자 탈냉전의 큰 흐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중국과의 협력, 북-일 수교 협상에서 일본으로부터의 보상금과 투자 등을 기대했다. 일본이 보기에 이 지역은 대륙 만주로 가는 관문이자, 투자거점으로서의 이점이 있었다. 중국은 1992년 이른바 덩샤오핑의 남순강화를 통해 남부 연안지역의 개혁개방 심화와 함께 북·중·러 국경협력을 통해 이 지역을 개발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성과는 미미했다. 남한과 동해에 면한 중국, 러시아와의 협력은 보따리장수들만 분주히 오가는 여전히 변방무역 수준에 머물렀다.
권세은 경희대 환동해지역연구센터 소장은 그럼에도 이때부터 “환동해는 지자체들이 국경을 초월해 능동적인 주체로서 서로 협력해 나서는 지역협력의 미래적 형식을 보여왔다”고 지적하고 있다. 양기호 성공회대 교수도 “동북아지방자치단체연합, 환동해권 지방정부 지사·성장회의 등 지방정부간 협력이 국익 우선의 중앙정부의 외교상 한계를 극복하면서 동해에서의 지리적 경제권 형성을 촉진해 온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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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5일 북한·중국·러시아 세나라가 맞대고 있는 국경지역을 중국 지린성 훈춘시 팡촨(방천) 용호석각에서 바라본 모습. 왼쪽이 러시아 하산, 망원경 왼쪽 앞이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을 알리는 토자비가 서 있고, 그 오른쪽으로 두만강 철교, 두만강과 두만강역 부근의 북한 모습이 보인다. 훈춘/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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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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