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과 오늘] 87년 6월 민주항쟁- 6월10일(화) |
역사학자 이이화의 27년 전 오늘 이야기를 들어보자. - "1987년 6월10일, 그날 나는 잠시도 쉬지 않고 시위대를 따라다녔다. 시민들과 함께 물안경과 마스크를 쓰고 때로는 보도블록을 깨서 '짱돌'을 만들어 시위 학생들에게 공급했다. 거리와 골목마다 전투경찰의 '닭장차'가 대기하고 있었고 또 경찰차마다 최루탄을 가득 싣고 있었다. 이한열군 추도식과 규탄대회가 끝난 뒤 참가자들은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쳤다. 그러자 최루탄·사과탄·지랄탄이 연달아 날아왔다. 연도의 시민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잠시 흩어지면 성공회 교회를 중심으로 종소리가 울렸고 남대문과 종로 쪽의 교회에서도 종소리가 들렸다. 또 지나가던 버스·택시·승용차들도 일제히 경적을 요란하게 울렸다. 곧 저항의 함성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절차적 민주주의의 커다란 변화를 초래한 87년 6월 민주항쟁은 한 젊은 죽음에서 촉발되었다. 1987년 1월13일 자정 자신의 하숙집에서 6명의 치안본부 수사관에게 끌려간 서울대생 박종철(언어학과 3학년)이 이튿날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죽었다. 치안본부장 강민창은 "박종철군 친구의 소재를 물으며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며 쓰러져 병원으로 옮겼으나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사건 수습을 위해 새로 임명된 내무장관, 80년 5월 광주항쟁을 총칼로 진압한 특전사령관 출신 정호용도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며 고문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나 현장을 처음 목격한 중앙대병원 내과전문의 오연상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의 황적준 박사의 양심선언으로 폭행과 물고문에 의한 살해였음이 밝혀졌다. 경찰은 서둘러 조한경 등 2명이 박종철을 물고문했다고 발표했다.
곧바로 시민사회 대표 9782명이 참여한 '박종철군 국민추도회 준비위원회'가 결성됐다. 2월7일 추도회와 3월3일 49재를 겸한 고문추방 민주화 대행진이 열렸다. 교수 및 종교인들의 비판 성명도 잇따랐다. '체육관 선거'를 거부하고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는 '직선제 개헌'에 대한 국민적 요구도 커져갔다. 당시까지 대통령은 국민투표가 아니라 장충체육관에서 간선으로 결정되었다.
- 1972년 10월 박정희 정권은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회 해산, 정치활동 중단, 언론 사전검열 등 특별선언을 발표하고, 막강한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유신헌법을 공표했다. 12월23일 장충체육관에서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2359명이 99.9%의 찬성률로 단독후보 박정희를 8대 대통령으로 뽑았다. 이른바 '체육관 선거'의 시작이었다. 80년 광주항쟁을 피로 진압한 전두환 역시 그해 8월27일 열린 제11대 대통령 선거에서 99.4%의 득표율로 당선된다. 역시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접선거, 체육관 선거였다. -
민주진영의 직선제 개헌 요구에 대해 전두환은 4월13일,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뽑는 5공 헌법을 유지하겠다는 '4.13 호헌' 담화를 내놓았다. 재야단체와 대학교수의 비판성명이 잇따랐고, 신부들은 단식기도에 돌입했다. 5월18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충격적인 진실이 드러났다. 광주항쟁 6주기 추도미사 도중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며 군사독재 정권의 정당성을 허물어뜨리는 성명을 발표했다.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의 주도 아래 모두 5명이 박종철 살해에 가담했음에도 단 2명만 고문한 것으로 꾸미고, 총대를 멘 2명에게 거액의 돈을 주었다는 사실이 새로 밝혀진 것이다.
이를 계기로 4·13 이후 소극적이고 분산적인 개헌운동이 범국민적 차원의 적극적 운동으로 바뀐다. '박종철 추도회 준비위'를 모태로 모든 민주세력이 참여한 '호헌반대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꾸려졌다. 국민운동본부는 민정당의 차기 대통령 후보 선출일인 6월10일,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전국에서 동시에 갖기로 결정하였다. 하루 전인 6월9일에는 연세대생 이한열이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쓰러져 학생, 시민들은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다.
'6.10 국민대회'는 전국 22개 지역에서 열려 40만의 시민이 동참했다. 예상을 뛰어넘는 결과였다. 오후 6시가 되자 택시기사들은 경적을 울리고, 성당과 교회의 종소리는 하늘로 퍼져나갔다. 시내버스 승객들은 흰 손수건을 흔들며 환호했다. 여고생들도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시위대에게 마실 물과 도시락을 가져다주었다. 회사원들로 이뤄진 넥타이 부대가 시위대에 합류하면서 6월 민주항쟁은 학생시위에서 시민항쟁으로 바뀌어갔다. 6월18일 '최루탄 추방대회'에는 16개 지역에서 50만명이, 6월26일 '국민평화대행진'에는 38개 지역에서 1백40여만명이 함께 했다. 6만여 경찰 병력으로는 막기에는 역부족인 전국적 저항운동이 이어졌다. 부분적이고 미봉적인 양보에 머물 수 없다는 국민적 의지는 6월29일 대통령 선거 직선제 개헌 등 전두환 정권의 '6.29 항복선언'을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학생은 물론 노동자, 시민, 빈민, 농민이 전국에서 펼쳐나간 6월 항쟁은 민주주의 이념과 제도가 뿌리내리는 계기가 되었고, 7·8·9월의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져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대통령 직선제가 1971년 이후 16년만에 부활한 것도 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과물이다.
장철규 기획위원 chang21@hani.co.kr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