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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6.12 17:52 수정 : 2014.06.13 09:16

2013년 6월13일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사고현장에서 열린 추모행사 참석자가 고인의 넋을 위로하며 종이 나비를 영정사진에 붙이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4강 신화를 일궈낸 한일 월드컵 열기가 온나라를 달구던 2002년 오늘, 두 여중생이 참혹한 죽임을 당했습니다. 어린 넋들에게 바친 추모시로 12년 전 그날을 돌아봅니다.

그날 유월 푸른 하늘
햇살아래 눈부신 흰빛으로 피어나던 접시꽃을 보았다
그날 유월 십삼일
미군의 궤도차량에 난도질처럼 으깨어진 흰 접시꽃 두 송이가 있었다.
살아서 세상의 작은 등불이었을 어린 꽃들이
붉은 피 흘리며 죽어 이 땅의 한 사람 한 사람
까맣게 잊고 살던 우리들을 일깨우는구나
여기 이렇게 우리들의 손에 들린 촛불이 되어 타오르는구나

죄가 있다면 이 잘못된 조국,
자국민의 존엄성과 생존권을 보호하지 못하고 짓밟으려는
못난 조국에서 태어난 것이리라
제국주의 미국의 식민지, 분단된 땅을 조국이라는 이름으로 둔 것이리라
사리사욕에 물든 이 나라 정치꾼들이
역대 군사독재 정권들이 너희들을 죽였다
미국에 빌붙어 눈치만 살피는 이 나라 대통령들이 너희들을 죽였다
- 박남준 시인의 〈흰 접시꽃 두 송이, 미선이와 효순이에게〉중에서 -

2002년 6월13일 오전 10시45분께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56번 지방도로. 친구의 생일잔치에 가던 조양중학교 2학년 심미선, 신효순 학생이 미군 2사단 44공병대 소속 가교운반용 궤도차량(운전사 워커 마크 병장·36)에 치어 그 자리에서 숨졌다. 사건 처리과정에서 비극은 분노로 이어졌다. 미군은 "조사 결과 신양과 심양의 죽음을 몰고 온 비극적 사건과 관련해 누구에게도 과실이 없다"고 했다. 더구나 '한-미 주둔군 지위협정(SOFA)' 제22조 3항에 따라 재판권을 가해자 쪽인 미국이 가졌다. 미 군사법원은 11월 말 무죄를 선고했다. 법정에서 무죄평결을 받고 미소까지 짓던 관제병과 운전병의 죄를 영원히 물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2002년 6월 내내 서울광장은, 대한민국 온누리는 ‘오 필승 코리아!’를 연호하는 붉은 함성으로 가득 찼다. 한겨레 박승화

2002년 6월 13일, 초여름
월드컵의 뜨거운 함성이 온 세계를 뒤덮고 있을 때
대한민국의 한 작은 도시 의정부에서는
들꽃 같은 두 소녀의 잔인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세계적인 화가와 무용가가 꿈이었던 우리의 두 여중생은
그렇게 갔다, 그렇게 백주대낮에 형체도 비명도 없이 갔다
바로 그 날,
우리들은 어디에 있었던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었던가
월드컵의 화려한 잔치 속에 불꽃놀이를 하고 있을 때,
'오 대한민국! 오 필승 코리아!'를 외치며 열광하고 있을 때,
'꿈은 이루어진다'는 대형 현수막을 활짝 펼치고 있을 때,
두 소녀의 꿈은 미군탱크 아래 참혹하게 짓밟히고 있었다
- 이산하 시인의 〈두 소녀의 죽음〉중에서 -

사고가 발생한 날은 지방선거 투표일이라 언론에 거의 보도조차 되지 않았다. 장례를 치르고 한줌의 재로 변한 이들을 보내던 날 국화꽃 한 송이씩을 손에 든 친구들은 교실의 빈자리를 보며 울음바다를 이뤘다. 느닷없는 어린 생명의 죽음 앞에 유족들은 피맺힌 울음을 오래토록 흘렸다. 탄식과 비통의 울음은 온 나라를 휩쓴 월드컵 열기 속에 묻혀버렸습니다.

2002년 12월14일 열린 ‘주권회복의 날 10만 범국민평화대행진’에 참석한 시민학생들이 촛불을 밝혔다. 6월의 붉은 함성이 울려 퍼지던 바로 그 자리에서. 한겨레 박승화

촛불이 타오른다.
촛불이 타오른다.
눈물처럼 촛불이
슬픔처럼 촛불이

여기 서울의 시청 앞에서
저기 부산과 광주, 인천 대전 대구 등 대도시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의 버스터미널에서, 농협공판장에서, 시장에서, 공원에서
촛불은 자존심의 화염이 된다.
여기 한반도에서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독일, 프랑스, 러시아, 스웨덴에서도
촛불은 뜨거운 연대의 화염이 된다.

효순아, 미선아
이 꽃밭에서 새처럼 나비처럼 날아오르렴
날아오르며, 날아오르며
다시 푸른 산이 된 사람들을 보아주렴
다시 붉은 마음의 화산이 된 사람들을 보아주렴
- 안찬수 시인의〈촛불〉중에서 -

피지도 못하고 하늘의 별이 된 250여 꽃송이를 가슴에 안은 채 다시 월드컵을 맞게 되었습니다. 장철규 기획위원 chang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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