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4.05.21 09:45 수정 : 2014.06.03 10:08

이갑수 소설 <3화>



나는 형이 책장 앞을 거닐며 책을 고를 때마다 조마조마했다. 형은 궁금한 것을 못 참는 사람이었다. 호기심으로만 치면 과학자가 됐어야 마땅하다. 정말 별걸 다 궁금해했다. 낮과 밤의 경계를 확인하겠다고 몇 주나 밤을 새운 적도 있었다. 문제는 형이 자신의 궁금증을 나를 통해 푼다는 것이었다.

형의 궁금증 때문에 나는 베란다에서 떨어진 적도 있다. 그날 형은 나를 난간에 매달았다. 나는 왜 이러느냐고 물었다.

-《시티헌터》 보면, 이럴 때 한 손으로 매달려 있다가 갑자기 상대 손잡고 올라오잖아. 그거 진짜 되나 궁금해서.

형은 그렇게 말하더니 오른발로 내 왼손을 지그시 밟았다.

아래를 보니 까마득했다.

-자, 잡아.

1분 정도 후에 형은 손을 내밀었다. 나는 만화 주인공처럼 초인적인 힘이 나오길 간절히 바랐다. 떨어지면서 만화가들, 아니 만화라는 장르를 만드는 데 일조한 모든 인간을 원망했다. 다행히 우리 집은 3층이었고, 아래에 쓰레기봉투가 쌓여 있어서 나는 죽지 않았다. 대신 오른쪽 무릎에 철심 세 개를 박았다. 덕분에 나는 군대에 가지 않았다.

그것만은 형에게 감사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저주하는 만화가를 고르라면 나는 전극진과 양재현을 선택할 것이다. 《열혈강호》의 작가들이다. 그들은 형에게 내공심법과 장풍, 경공술에 대한 궁금증을 갖게 했다.

-무공을 익히기 위해서는 인고의 시간을 견뎌야 해.

형은 벽곡단이라면서 좁쌀과 보리에 꿀을 섞은 환을 만들어서 내게 먹였고, 새벽마다 약수터에 끌고 가서 물 밑에 가부좌를 틀게 했다. 내공은 쌓이지 않았다. 대신 설사병과 감기에 걸렸다. 11킬로그램이 빠졌다. 빙백신장 수련에 동원된 내 가슴에는 늘 멍이 가득했다. 뚝섬유원지의 오리 배에 매달려서 수상비를 연습하다가 물에 빠져 119에 구조된 적도 있었다. 그나마 형이 SF 만화를 읽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형이 《암즈》나 《기생수》 같은 만화를 봤다면 나는 한쪽 눈이나 팔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내게 안전한 만화는 《드래곤볼》뿐이었다. 그 만화는 형만큼이나 이상한 세계관을 갖고 있다. 가령, 손오공의 친구인 오룡이라는 캐릭터가 나온다. 한마디로 설명하면 변신술을 할 줄 아는 말하는 돼지다. 그런데 손오공이 천하제일무술대회에서 우승하고 밥을 먹는 장면을 보면, 식탁에는 언제나 통돼지 구이가 있다. 나는 돼지랑 친구인데 돼지를 즐겨 먹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이해했다. 그런 게 사람이다.

《드래곤볼》이 안전한 이유는, 거기에 나오는 기술이나 설정이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형은 에네르기파나 원기옥의 자세를 흉내 냈지만, 전혀 위험하지 않았다. 성공한 것은 초사이어인이 되겠다고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것과 왁스로 머리를 세우고 다니는 것 정도였다. 조금 창피하기는 했지만, 형이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든 상투를 틀든 나하고는 관계없었다.

《드래곤볼》은 총 마흔두 권이다. 손오공과 친구들은 끊임없이 적들과 싸운다. 나는 마지막 권을 읽지 않았다. 그들의 싸움이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한겨레출판 문학웹진한판 바로가기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이갑수의 <아프라테르>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