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 소설 <4화>
돌이켜보면 형이 고르는 만화들은 어떤 형태로든 주인공이 치고받고 싸우는 내용이었다. 형은 만화에 나오는 기술이나 수련 방법을 내게 실험했다. 지금도 만화를 보면 그때의 기억들이 떠올라서 몸이 떨린다. 형은 싸움을 잘했다. 좋아하기도 했다. 잘해서 좋아한 건지, 좋아해서 잘하게 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세상에는 태어날 때부터 강한 인간이 있다. 이를테면 종합격투기 챔피언 표도르 같은 사람이다. 어떤 사람들은 표도르가 삼보를 배웠으니 삼보가 최강의 무술이라고 말한다. 내 생각은 다르다. 뭘 배워서 강해진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원래 강한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형도 같은 종류의 인간이었다. 우리 동네에는 완력으로 형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표도르도 질 때가 있다.
형의 첫 패배는 이태원에서 벌어진 싸움이었다. 상대는 2미터가 넘는 흑인이었는데, 형은 15분 동안 이백스물여섯 대를 맞았다. 엄마는 형이 그렇게 될 때까지 넌 뭘 하고 있었느냐며 나를 혼냈다. 하지만 나는 절대로 형이 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그것이 링에서 벌어진 시합이었다면 형은 진 것이 아니었다. 흑인이 때리다 질려서 돌아갈 때까지 형은 쓰러지지 않았다. 양팔에 가드를 굳힌 채로 꼿꼿이 서서 최후의 한 방을 노리고 있었다.
병원에서 퇴원한 형은 설득력을 갖춘 사람이 되었다. 형이 설득력을 사가지고 왔을 때 나는 그게 뭐냐고 물었다.
-설득력.
형이 말했다.
-너클이잖아?
내가 말했다.
-설득력.
형은 설득력을 손에 끼고서 다시 말했다. 나는 바로 설득되었다. 한 달 정도 이태원을 어슬렁거리던 형은 결국 2미터가 넘는 흑인을 설득해서 부하로 만들었다. 그 흑인의 이름은 존슨이었다.
얼마 안 있어 형은 담임을 설득하고 학교를 그만뒀다. 사실 그동안도 제대로 학교에 다닌 것은 아니었다. 형의 출석부는 출석, 결석, 조퇴, 지각의 숫자가 서로 비슷했다.
학교의 조치가 좀 더 적절했더라면 형은 고등학교 정도는 졸업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형이 계속 사고를 치자, 교장은 국가대표 럭비선수 출신의 체육 교사가 있는 반으로 형을 보냈다. 잘못된 결정이었다. 형이 꼼짝 못 하는 건 오히려 몸집이 작은 여선생들이었다. 그건 엄마의 영향이 크다. 어릴 때부터 형은 동네에서 온갖 말썽을 부리고 다녔는데, 엄마는 형이 누구랑 싸우고 오든 크게 혼내지 않았지만, 상대가 여자아이일 때는 옷을 몽땅 벗겨서 집 밖으로 내쫓았다. 몇 번이고 그런 수치를 당한 형은 여자들을 무서워했다.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여선생이 담임이었어도 형은 학교를 그만뒀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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