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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5.23 09:57 수정 : 2014.06.03 10:03

이갑수 소설 <5화>



형이 학교를 그만뒀을 때 나는 남몰래 박수를 쳤다. 그동안 형 때문에 내 학교생활도 엉망이었다.

-영어로 생각하고 영어로 말하는 건 어떤 기분일까?

내가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형은 그런 궁금증을 가졌다.

나는 사전으로 공부했다. 단어를 외우고 예문을 읽고, 어원을 찾아보는 방식이었다. 중학교를 마칠 때쯤 점심시간마다 원어민 교사의 말 상대를 하는 학생이 됐다. 그동안 형은 질문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질문에 대답했다.

-한국어로 생각하고 한국말 하는 거랑 똑같아.

형은 그럴 줄 알았어, 라고 말하면서 손뼉을 쳤다.

형 인생의 최대의 궁금증은 여자였다.

-저 치마 속에는 뭐가 있을까?

형이 제일 많이 한 질문은 그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궁금증만큼은 풀어주지 않았다.

-안 해. 그런 거 시키면 아가페 누나한테 이를 거야.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형의 부탁을 거절했다. 아가페는 유미 누나의 세례명이다. 유미책방은 일요일마다 문을 닫았다. 사장과 누나가 성당에 다녔기 때문이다. 형은 그 사실을 알자마자 나를 데리고 성당에 갔다.

형의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성당에서 누나는 초등부 선생님 겸 성가대의 피아노 반주자였다. 형과 나는 성가대에 들어갔다. 누나는 시간만 나면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신앙보다 피아노에 더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집에는 전자피아노밖에 없으니까.

누나는 원래 음대에 가고 싶었는데, 돈 때문에 포기했다고 했다. 누나의 연주는 훌륭했다. 정말로 그랬다. 반면 형의 노래는 형편없었다. 노래보다는 기합 소리에 가까웠다. 나도 형을 비웃을 처지는 아니었다. 듣기 싫기는 매한가지였으니까.

누나는 예배가 끝나면 형과 나를 따로 불러 성가 연습을 시켰다. 신입이라 원래 하는 건지, 우리가 노래를 못해서 하는 건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리스어로 ‘아’가 없음을 뜻하는 부정어야. 아카펠라는 반주 없음, 아템포는 박자 없음. 너희는 아멜로디쯤 되겠다.

몇 주가 지나도 진전이 없자 누나는 그렇게 말했다.

-멜로디 없는 노래도 있어요?

내가 물었다.

-아 아아아 아아아아아.

누나는 대답 대신 발성 연습을 했다. 우리는 누나를 따라 했다. 좀처럼 잘 되지 않았다.

-그럼 아가페는 뭐가 없는 거예요?

형이 물었다. 아가페는 무조건적인 사랑이란 뜻이다.

-글쎄. 미움 없음 아닐까?

누나가 대답했다.

-아가페, 확실하지 않은 건 조심해야지.

연습을 지켜보던 수녀님이 끼어들었다.

-아님 말고요. 자 연습하자.

두 달이 지나도 우리의 노래 실력은 나아지지 않았다. 누나는 우리의 목소리에도 ‘아’를 붙였다. 입만 벙긋거리라고 했다. 나는 기분이 상했지만, 형은 성가대에 남아 있을 수만 있으면 아무래도 좋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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