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7.10 21:21
수정 : 2006.07.10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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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미 대중예술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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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국사회
나는 가끔 우리 세대의 기막힌 운명에 대해 생각할 때가 있다. 전후 베이비 붐 속에서 태어나 군부정권 시절에 20대 초반을 보낸 세대들 말이다. 이 세대는, 성인과 청년의 갈등을 첨예화한 청년문화를 일구고 학생운동 전성기 때에 대학을 다녔다. 이 세대가 대학을 졸업하면서, 교사와 사무직, 전문직 등에 노조가 생겨 고학력 넥타이 부대가 머리띠를 묶었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육아조합을 만들고 학부모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심지어 아이들 손을 잡고 광화문 촛불집회까지 데리고 다니고, 인기 연예인이 되고서도 시위장에서 마이크를 쥐었다. 하여튼 이 세대는 어디 가서든 남 안하던 짓을 하며 티를 냈다.
친구들끼리 수다를 떨면서 이런 얘기를 했다. 아마 우리는 늙으면 노인운동을 하게 되지 않을까. 노인복지예산 몇 퍼센트 올리라고 머리띠를 묶고, 노인운동 시민단체를 결성하여 정책을 제시하고, 노인 대상으로 장사만 해먹는 악덕 기업체들의 명단을 작성하고, 조합을 만들어 실버타운을 꾸릴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하면서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의 바로 앞 세대들은, 우리 세대 때문에 매우 괴롭고 진절머리 날 터이지만, 사실 우리 세대도 이렇게 사는 게 지겹다. 그래서 이렇게 살지 않으려고 종종 도망친다. 그러나 이내 어디에서든 이 세대의 본색이 드러난다. 어디서든 뭔가를 바꾸기 위해 사람을 조직하고 설득하는 못 말리는 인간들이 꼭 한두 명씩 있다. 어쩔 수 없는 우리 세대의 운명이려니 하는 것이 마음 편하다.
세상이 바뀌었다지만, 오히려 이 세대를 보는 세상의 눈은 불편하기 이를 데 없다. 도처에서 나타나는 이 세대의 이런 모습이 텔레비전 드라마 같은 데서 거의 등장하지 않는 것도 그 이유가 아닐까. 작가나 연출가의 태반이 이 세대들임에도 기껏해야 ‘어두웠던 지난 시기’를 회고적으로 그리는 작품에서나 이 세대의 모습은 나타날 뿐, 현재 아직도 좌충우돌 세상 속에서 온갖 티를 내고 사는 모습을 드라마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재벌 2세나 신데렐라 아가씨, 좌충우돌 싸가지 없지만 상큼발랄한 신세대, 주책스럽지만 푸근하고 편안한 노인 인물 등은 텔레비전 드라마의 세계에서 함께 살 수 있다. 시청자들은 브라운관 속의 이들을 부러워하거나 욕하거나 무시하면서도, 어쨌든 이들과 호흡을 주고받으며 달콤쌉쌀한 욕망을 부담 없이 드러내고 편안해 한다. 그러나 세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어쩔 수 없이 손발이 반골처럼(그러나 나름대로 성실한 모범생처럼) 움직이는 세대의 모습은 결코 욕망의 대상이 되지도 못하고 편안하지도 못한 모양이다.
우리 사회 전체가, 심지어 이 세대 자신들에게도, 이런 모습이 편안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다는 것은, 바람직함을 따지기 전에, 엄연한 현실이다. 이들 때문에 세상이 달라지기도 하지만 자신의 능력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 사사건건 나서고 해결의 구체성은 부족하니 도대체 미덥지 못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이들에게 느끼는 불편함은 그것들의 총합 그 이상이다. 역사 속에서 누적된 불편함 같은 것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살 운명을 지닌 이 세대는, 절대로 잘난 척하고 자만하며 살 일이 아니다, 자신 있는 척, 잘난 척하면 나부터도 등을 돌리고 싶어진다. 심지어 이제는 표도 찍어주고 싶지 않다.
그러고 보면 집회를 주도한 ‘국민배우’ 안성기에 대한 세상의 호감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그는 어디에서나 성실하고 도덕적이면서도 겸손하고 자만하지 않는다. 소환에 불응한 그에게 세상이 어떤 태도를 보일지 자못 궁금해진다.
이영미 대중예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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