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원 서울디지털대 문예창작학부 교수
|
야!한국사회
자유라는 이름을 듣기만 해도 내 가슴은 고동친다. 부자유가 가져다 줄 비만보다 나는 자유를 찾음으로써 얻게 되는 강골의 마른 몸을 사랑한다. 그래서 나는 표현의 자유라는 말 역시 좋아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제의 가장 소중한 덕목이 표현의 자유 아닌가. 그러나 김수영이 어떤 시에서 쓴 것처럼 자유에는 얼마간 피 냄새가 섞여 있다. 그러나 짧지도, 그렇다고 길지도 않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나를 진정으로 염려해주었던 분들이 자주 내게 들려주었던 말은 이런 것이었다. “사는 게 다 그런 거다. 웬만하면 눈 질끈 감고 살아라.” 이 말 속에는 오랜 세월 세속적 처세를 통해 근근이 눈치 보며 살 수밖에 없었던 생활인들의 통계학적 지혜(?)가 잘 담겨 있다. 그 지혜를 내 식으로 말하자면 ‘표현의 회피’ 정도가 되겠다. 나는 이 표현 회피 현상이야말로 생활인들의 가장 유력한 생존본능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 표현의 회피를 통해서 개인들의 삶은 더욱 옥죄어간다는 게 이 사회의 기이한 구조다. 가령 비리로 얼룩진 어느 분규사학에 ‘표현의 회피’를 추종하는 한 교수가 있다고 치자. 그 교수의 옆방에는 ‘표현의 자유’를 추구하는 다른 교수가 있다고도 생각해 보자. 표현 회피를 추구하는 교수는 옆방의 교수가 머지않아 연구실을 비우게 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 생각은 대체로 합리적인데, 실제로 재단의 전횡과 비리를 고발하고 그것을 바로잡는 데 혼신의 열정을 다한 교수들은 지금 거리에 있거나, 법원에서 지루한 소송을 벌이고 있거나, 아니면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을 확률이 높고 또한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표현의 회피를 선택한 교수의 삶은 쾌적한가? 이 또한 합리적인 결과를 낳는데, 표현 회피가 자신을 재단의 꼭두각시로 만들고, 더 나아가서는 동료교수를 찍어내는 재단과 대학본부의 구사대 역할로 이끄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살아남았다는 생활인의 안도감에 빠진다면 다행이겠지만, 이 표현의 회피를 추종하는 교수는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표현 자유의 잔존세력을 박멸하고자 더욱 분주해질 것이다. 말 그대로 교수가 아닌 구사대가 되는 것이다. 어떤 것이 분명히 인간다우며 아름다운 삶인지는 분명하다. 표현의 자유에 기꺼이 참여하는 자의 삶이 그러하다. 그러나 자유에는 제도가 보호해줄 수 없는 지극히 내면적인 고통이 따른다. 그렇다고 해서 표현 회피를 선택한 자가 쾌적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그의 정신은 인형처럼 타인의 입 모양을 따라 움직여야 한다. 그 움직임은 점점 동물 형상을 닮아가게 되고, 성정 또한 그렇게 변해 가는데, 그래서 얻게 되는 것이 밥통 속의 쌀 한줌일 것이다. 나는 표현의 자유를 선택하는 편에 서고 싶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내가 표현 회피 쪽에 서 있는 사람들을 경멸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들 중에는 기꺼이 경멸받아 마땅할 존재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오히려 이 부분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구조를 근본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표현의 자유 쪽에 인센티브를 과감하게 줄 수 있는 방향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사실이다. 제도와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이 제도와 구조 역시 사람이 만든 것 아닌가. 회피보다는 자유의 욕망이 힘이 세다. 그렇게 믿고 싶다.이명원 서울디지털대 문예창작학부 교수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