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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10.19 20:35 수정 : 2006.10.19 20:35

서민/단국대 의대 교수·기생충학

야!한국사회

지난해 말, 어느 신문사 문학상의 수상작이 된 책의 단편 하나가 표절 의혹에 휩싸인 적이 있다. 말이 의혹이지 읽어 보니 명백한 표절이었는데, 네티즌들의 빗발치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입장 표명을 하지 않은 채 휴대폰마저 끄고 잠적했다. 한참 후에 돌아온 그는 독자들이 바라던 사과는 하지 않은 채 “더욱 성숙하는 계기가 되도록 자숙하겠다”는, 지극히 정치인스러운 변명만 인터넷에 올렸다. 시간이 지나 그 사건은 잊혀졌고, 그는 신문에 글도 쓰며 잘 지내는 듯하다.

올해 초, 여기자의 가슴을 만져서 파문을 일으킨 최연희 의원이 택한 방법도 잠적이었다. 그는 주변과의 연락을 끊고 보름이 넘도록 지역구인 강원도에 머물렀는데, 복귀 후 의원직 사퇴는커녕 “더욱 분발하겠다”고 말해 식당 주인들을 떨게 만들었다. 한달 전 상임위원회에 참석하며 의정 활동을 재개했던데, 얼마 전에는 국감장에도 나와 관심의 초점이 되기도 했다. 꼬박꼬박 세비는 타가면서 아무 일도 안 한 게 미안했나 본데, 그가 국감장에서 한 말이 난 왜 이렇게 웃긴지 모르겠다.

“지금 양성 평등이라고 해서 남녀평등 의식이 높아졌는데 배우자에 대해 (사망 조의금의) 차이를 두는 것은 곤란하지 않나.”

최근엔 베스트셀러가 된 책의 번역자로 알려졌던 어느 아나운서가 실제 번역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원번역자가 입을 열었고, 기사 몇 개만 읽어 봐도 대략의 전말을 짐작할 수 있음에도 출판사는 ‘이중번역’이란 해괴한 신조어를 만들고, 한 검색 사이트는 사건 초기 댓글을 차단하면서 그 아나운서를 온몸으로 보호하려 했다. 정말 그가 번역한 게 맞다면 번역한 원고를 보여줌으로써 간단히 진실이 가려질 텐데, 침묵으로 일관하던 그는 자신이 진행하던 방송에서 “팬들을 실망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말로 해명을 대신했다.

일련의 사태를 보며 이런 의문을 가졌다. 왜 그들은 떳떳하게 사과하는 대신 잠적을 해버리는 것일까? 몇 가지만 추측해 본다. 첫째, 소나기는 피하고 보는 게 상책이지 성난 군중 앞에서 섣불리 변명을 하다간 파문이 더 커지기 마련이다. 예컨대 “식당 주인인 줄 알았다”는 말을 변명이랍시고 했던 한 의원을 생각해 보라. 둘째, 우리 국민들의 놀라운 망각력이다. 망각은 엄청난 시련을 견디게 해주는 순기능도 있어, 질곡의 현대사를 살아야 했던 우리 국민들은 세계에서 유례없이 망각력을 발달시켰다. 인터넷에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위기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일으킨 것”이라는 댓글을 보고 쓴웃음을 짓기도 했는데, 망각의 힘이 이렇게 크다 보니 한 일주일만 잠수해 있으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 잊혀진다. 셋째, 초코파이의 성공이 ‘정’ 마케팅에 힘입었던 것처럼, 우리 국민들은 유달리 정이 많다. 아무리 미워도 내 자식이 고생하는 걸 보면 마음이 짠하다. 최 의원이 잠적하던 시절 그의 지역구엔 ‘최 의원을 지지한다’는 펼침막이 여럿 걸려 있었다고 한다. 지금 한번 네이버를 가 보시라. 그 아나운서의 번역 의혹을 제기하는 기사마다 팬들이 “그분은 피해자다”, “예쁘니 봐주자”는 댓글이 주르르 달려 있을 거다.

큰 사건이 날 때마다 당사자가 잠적하는 건 그게 잘 먹히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라면 나 같아도 사고를 치고 나면 잠적을 선택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잠적보단 진솔한 사과가 더 아름다운 해결책이고, 사과와 더불어 책임지는 모습을 보일 때라야 용서가 가능하다. 잠적의 당사자들도 각성을 해야겠지만, 잠적이 발을 못 붙이도록 하는 풍토가 만들어지는 게 더 중요할 듯하다. 겪을 일 다 겪었다. 이제 그만 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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