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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10.23 22:13 수정 : 2006.10.23 22:13

이영미 대중예술평론가

야!한국사회

얼마 전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토론을 시키다가 적잖이 놀란 적이 있다. 한 학생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을 했는데, 나는 한동안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학생과 내가 서로 이해하지 못한 이유는 ‘이해하다’라는 말을 다른 의미로 썼기 때문이다. 즉 나는 학생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한 것을, 그 구절이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 납득되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는데, 그 학생이 말하고자 한 것은 ‘내가 동의할 수 없다’였다.

하긴 일상 대화에서 ‘이해되지 않는다’라는 말을 이런 의미로 쓰기는 한다. “걔 정말 마음에 안 들어. 이해할 수가 없네” 같은 말을 했을 때, 그 ‘이해’란 말은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동의하느냐 혹은 용인하느냐 여부의 문제다. 인식과 용인의 의미를 종종 뒤섞어 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말 사용법에는 우리의 태도와 사고방식이 고스란히 나타난다. 즉 우리는 자신이 용인·동의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이해·납득을 하지 못한다는(혹은 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사실에 관한 문제와 자신의 호불호의 문제가 뒤범벅되고, 호불호와 옳고 그름의 문제가 뒤범벅된다.

미숙한 어린아이들이라면 이런 사고는 정상적이다. 아이가 가구 모서리에 부딪혀 울음을 터뜨리면, 어른은 가구 모서리를 “때찌 때찌” 하고 야단치며 아이를 달랜다. 미운 것을 나쁜 것으로 간주하여 징벌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뒤범벅이 스무 살이나 되는 대학생들에게, 그것도 논리적 말하기를 해야 하는 토론수업에서 나타난다면 심각한 현상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자신의 욕망을 고스란히 드러낼 줄만 알았지, 그것을 객관화하여 이해하는 능력을 키우지 못한 애어른들이기 때문일까.

하지만 이런 현상은 ‘요즘 젊은이’만이 아니다. 어른들의 비논리적 뒤범벅 역시 만만치 않다. 내가 어릴 적에 가장 이해도 용인도 되지 않았던 말이 야단맞을 때에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어”라고 충고하는 어른들의 말이었다. 이제는 그 상황이 납득(나의 표현대로 하자면 ‘이해’)은 되지만, 역시 용인되지는 않는다. 문제가 벌어졌을 때에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래야만 반성하고 징벌을 받아들일 것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대개 이 과정을 생략했다. 중요한 것은 나쁜 짓을 했는가가 아니라, 그것으로 어른이 노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의 해결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어른의 노함을 풀어드리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런 말을 하는 어른들은, 정작 가장 큰 잘못은 사리에 맞지 않는 행동이 아니라 어른을 노하게 한 그 자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시비를 가리고자 하면 무례한 말대꾸이며 ‘말 많은 공산당’ 짓이 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사회의 갈등이 조정되지 않는 것은 이러한 논리적 능력 부족에서 기인하는 바가 커 보인다. 뉴스에 안기부, 추경예산, 경총, 피에스아이(PSI) 등등 온갖 약어들이 판을 치는 사회에서, 아이들이 쓰는 ‘열공’, ‘즐감’ 같은 약어의 사용을 나쁜 짓으로 치부하는(사실은 어른들에게 낯설기 때문에 싫고, 그래서 용납할 수 없는 나쁜 언어라고 간주해 버리는) 현상은, 우리 사회에 얼마나 비논리적인 사고가 횡행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어른 세대는 덜 무모하여 큰일 치는 일이 적을 뿐 따지고 보자면 자신이 ‘싫어하는’ 가수에게 독극물이 든 음료수를 먹인 젊은이와 얼마나 다르겠는가.

이영미 대중예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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