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11.20 17:54
수정 : 2006.11.20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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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혜정/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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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국사회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만나는 상대방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별하고 싶어 한다. 다행히 주민등록증에서부터 공중화장실까지 다양한 공간은 그들이 여성인지 남성인지 확인할 수 있게 한다. 또 그 사람의 외모, 옷차림, 말투, 태도 등으로 성별이 쉽게 구별되기도 한다. 아니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라 다양한 관계 속에서 사람들의 성 정체성은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여성인지 남성인지 구별할 수 없다면 또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다르게 말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이 세상은 필시 당황할 것이다.
최근 지하철에서 만난 10대들은 외모가 모호하게 보이는 어떤 사람 옆에서 그 사람의 성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결국 ‘트랜스젠더’라고 결론짓더니 곧 원래 성별이 남자인지 아닌지를 속삭이면서 토론하고 있었다. 그 사람도 이런 중얼거림을 들었을 것 같지만 전혀 내색을 하지 않고 다음 역에서 내렸다. 그 뒤를 보면서 10대들은 “원래 남자인 것 같아, 형!” 좀 더 큰 소리로 불러대며 깔깔거렸다.
왜 그/녀들은 그 사람이 남자/여자인지에 그리 관심이 있을까? 그 사람이 남자라는 것과 여자라는 것이 그/녀들과 어떤 관련을 맺을까? 혹 여자라면 성추행을 안 하려고 조심하기 위해서인가? 물론 사람들은 타인의 성별뿐 아니라 나이, 학교, 지역, 최근에는 인종·국가 등에 대해서도 궁금해한다. 혹자는 이를 타인에 대한 애정이라고 말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이는 ‘필요 없는 과잉 간섭’이다.
성별에 대한 과도한 관심은 다양한 영역에서 살고 있는 각 개인의 품성이나 능력보다도 제도적으로 기획된 성별에 대한 전형적인 가치나 규범들을 재확인하면서 여자로서 또는 남자로서 나를 만들기 위해서다. 이러한 의심은 최근 대법원의 트랜스젠더에 대한 인식이나 성별 변경에 대한 특별법 발의안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사회가 호명하는 성별 체계와 자신이 경험하는 정체성 사이의 차이를 주장하는 사람들, 정치적으로 트랜스젠더들은 남자-여자라는 성별의 상호교환 의미 이상의 사람들이다. 현실적으로 ‘타고난’ 남녀 그 어느 하나로만 살아야 하는 이 사회에서 자신들의 경험세계가 그렇지 않음으로 해서 트랜스젠더들은 고통 받는다. 호르몬 요법에서부터, 나아가 수술을 통해 몸의 형태를 바꾸기를 원하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그들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사회가 트랜스젠더를 인정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고통의 경험을 ‘병’(성 정체성 장애, gender identity disorder)이라고 말할 수 있어서다. (‘병’이기 때문에) 성기수술 등의 의료적 입증이 있고, (동성결혼 불허라는 사회문화적 법체계를 위반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혼인 사실이나 자녀가 없으면 성별 교환과 호적 변경을 이 사회는 허락하겠다고 한다. 이 사회의 이분법적인 양성체계, 사회제도적 가치판단은 전혀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강력하게 남성임과 여성임을 명령하는 이 사회는 트랜스젠더뿐 아니라 ‘그냥’ 남성, 여성으로 살려는 사람들까지도 ‘병’자로 만든다. 이 사회가 만든 규칙에 들어오지 않은 자들, 성별의 규범을 위반하는 자들은 언제나 비정상이고 일탈된 병자였다.
이 사회가 매일 강조하는 인권을 보장한다는 것은 이제까지의 사회문화적 체계에서 ‘고통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이 체계에 맞게 바꾸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경험세계를 이해해 ‘이제까지 당연한 것들, 그래서 고통을 만든 것들을 바꾸는 것’이다. 이 간단한(?) 진실이 왜 이리 소통되기 힘들까?
변혜정/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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