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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3.26 17:53 수정 : 2007.03.26 17:53

권수현/한국여성민우회 편집위원

야!한국사회

최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군대위안부’에 관한 거듭된 망언을 접하면서 <요코이야기>와 그 책의 저자인 가와시마 왓킨스를 생각하게 된다. 조선인을 가해자로, 일본인을 피해자로 묘사한 이 책에서 그는 일본인들이 갖고 있는 피해의식의 정체를 보여준다. 전쟁이 얼마나 나쁜지를 인식시키고 평화적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그 책을 썼다고 주장하는 그는,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에 대해서 최근까지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자신의 조국 일본이 집단적으로 저지른 범죄행위를 두고서는 전혀 알지 못한 채 전쟁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포함한 평범한 일본인들이 겪은 고통만을 선별적으로 기억하는 것(그것이 사실이건 허구이건), 전범인 자신의 아버지에 관한 진실은 누락한 채 스스로를 평화주의자라고 지칭하는 것, 이렇게 과거사의 일부만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아베 총리의 뻔뻔스러운 날조와 왜곡보다 더 위험하다. 이야기화된 기억 밖의 역사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관한 한 우리 스스로도 일본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리 사회에서 일본군 성노예 문제가 사회적 의제로 떠오른 건 1990년대였다. 무려 50여년이 흐른 시점에서야 ‘피해 여성의 말’이 공식적 언어로 채택될 수 있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 사회에 그동안 50년간의 견고한 침묵이 있었다는 얘기다. 우리 사회의 집단적 무지로 말미암아 피해 여성들은 과거의 상처 위에 침묵과 부재라는 또 한 겹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처음 ‘군대위안부’라고 알려진 일본군 성노예 문제가 가시화하고 이슈화했을 때, 나는 피해 할머니들의 증언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그때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분들의 ‘기억상실증’이었다. 일본이 패전한 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분들 중 상당수가 우리말을 하지 못했고, 자신의 부모·고향, 심지어 자기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언어적 인지 기능이 성숙한 20대에 강제 연행된 분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현상을 정신의학에서는 극심한 스트레스나 심리적 부담으로 말미암암 발생하는 자기방어의 일부분으로 설명한다. 곧, 기억하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발생하기 때문에 기억이 지워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여성들의 상실된 기억과 고국으로 돌아와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피해 할머니들이 겪어야 했던 고립과 소외의 아픔, 그리고 ‘일본군 성노예 문제’가 오랫동안 역사에서 누락된 채 공식적 기억의 저편에 가려져 있었던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진실’의 반대말은 ‘거짓’이 아니라 ‘망각’이라는 말이 있다. 일본 정치인들이 군대위안부 문제에 대해 망언을 거듭할 때마다 나는 그 문제에 대처하는 우리 모습에서 어떤 허약성을 발견하게 된다. 정작 피해 당사자인 우리가 일본군 성노예 문제의 실체를 과연 제대로 알고 있기나 한 것일까 하는 의문 때문이다. 수십 년 굳게 닫혀 있던 고통스러운 기억의 상자를 열어젖힌 지금, 당시의 상황을 증명할 구체적인 자료를 확보하는 일과 함께 피해 할머니들이 겪은 그 후의 삶에 대해 조명하는 작업들, 50년의 역사적 침묵에 대해 성찰하는 일 역시 중요하다고 본다. 우리 사회가 피해 여성들을 얼마나 가혹하게 배척했는지를 두고 성찰한다고 해서 가해 국가에 대해 대응 논리를 상실하는 건 아니다. 왜곡된 기억과 누락된 기억을 가진 쪽보다 성찰적으로 복원된 역사의 기억을 가진 쪽으로 진실의 무게는 기울어질테니까.

권수현/한국여성민우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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