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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5.30 17:47 수정 : 2007.05.30 17:47

이명원/문학평론가·<비평과 전망> 편집주간

야!한국사회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사유하라고 했다. 어느 날, 수용자 인문학 강의를 함께 하고 있는 철학자 조광제 선생이 지나가듯 나에게 한 말이다. ‘세계로 열린 창’인 몸을 통해서 우리는 감각과 지각, 이를 통한 판단과 실천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런데 글쓰기를 시작했던 고교 시절부터 대략 30대 중반까지 나는 몸을 혹사함으로써 마음의 통증을 휘발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책읽기와 글쓰기라는 ‘골방의 사색생활’조차 몸의 혹사를 대가로 한 것이었기에 관념만이 비대해지는 상황을 개선하지는 못했다.

경험주의자는 아니나, 지금은 글쓰기가 몸쓰기에서 온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나는 과거에 비해서는 약간 변했다. 올해 상반기를 나는 병원과 학교, 감옥과 법정을 오가는 것으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예전 같으면 이런 경험의 반경을 나는 같은 공간에 대한 이론적 탐구인 철학자 미셸 푸코의 책을 읽으면서 의미화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세상이 책에서 읽은 것과 똑같다.”

그러나 ‘몸’으로 본 세상은 ‘조금’ 다른 것이었다. 나는 이 ‘조금’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몸쓰기로서의 글쓰기가 갖는 아주 큰 차이고 중요한 발견이라고 생각한다. 암 병동에 입원해 있는 가족을 문병하거나 간병하는 일은 역시 괴로운 일이다. 그러나 설사 암 병동일지라도 그곳에서 자주 쾌적한 웃음이 번지기도 한다는 사실은, 죽음 앞에서도 힘 있는 인간들의 낙천주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푸른 수의를 입고 정물화된 사물처럼 앉아 있는 수용자들과 ‘시’를 함께 읽는 일이 처음에는 무모해 보였다. “교도소에서 웬 시 읽기냐.” 처음엔 그들도 그런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윤동주와 김수영, 그리고 천상병 등의 시인 역시 한때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었고, 시인이란 넓게 보면 갇힌 세계에서 사랑과 자유의 통로를 뚫고자 했다는 점에 우리는 동의했다. 강퍅한 세상에서 한 편의 시는 무력해 보이지만, 사람의 희망이 끈질긴 것처럼 서정시도 힘이 세다.

상품이 화폐로 변환하는 과정을 ‘생사를 건 도약’이라고 표현했던 마르크스의 견해를 대학원 학생들에게 설명하는데 다들 의아한 눈빛이었다. 가령 사랑도 그러하다. 건조하던 두 남녀가 갑작스럽게 자신들이 연인이라고 느끼는, 순간적이지만 절대적인 도약의 시간이 있다. 이런 설명을 덧붙이자 그들의 눈빛이 갑자기 밝아졌다. 추상화된 논리를 경험적인 사실들에 빗대어 이야기하면, 졸던 학생들도 눈을 뜨고 토론에 참여했다.

무려 열 달을 넘게 끌어오던 나 자신의 교수지위확인 소송에 대한 선고가 지난주에 내려졌다. 결과는 거의 완벽한 승소였다. “나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그런데 소설의 주인공이 아닌 현실의 사람들은 그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종종 법 앞에 서야 한다. 승소라는 개인적인 기쁨과는 무관하게, 상식과 윤리의 영역까지도 법의 판단으로 이월되는 현실이 나에겐 여전히 부조리해 보인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지금도 나는 푸코와 마르크스, 그리고 루카치 등을 거론하면서 이 짧은 칼럼을 써내려가고 있다. 몸쓰기를 하겠다고 자처했지만, 내 몸 안에는 세상의 잡다한 온갖 책들이 인용을 기다리고 있는 형국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른바 지식인임을 자처하는 자들은 이렇게 열린 감각의 소유자이기보다는 ‘책-기계’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는 좀더 세상을 떠돌아야 하겠다. 몸으로 사유하는 일이란 참 어렵다. 반대로 그래서 해볼 만한 일인 것 같기도 하고.


이명원/문학평론가·<비평과 전망>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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