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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조광수/청년필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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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국사회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멧등마다/ 그날 스러져 간/ 젊음 같은 꽃사태가/ 맺혔던 한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시인 이영도의 시이며 4월 혁명을 기념하는 노래 ‘진달래’의 1절 가사다. 시인이 노래하듯 눈이 부신 젊음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을 던졌고 그날 이후 진달래는 한이 터지듯 붉게 피어났다. 올해도 진달래는 피었고 4월의 19일이 지나갔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엔 해마다 4월이 되면 ‘진달래’를 들을 수 있었다. 4월19일이 다가올수록 대학은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침내 그날이 오면 수천명의 학생들이 “독재 타도, 민주쟁취”를 목놓아 외치며 하나가 되었다. 이른바 4·19 주간에는 세미나와 심포지엄 등 학술 행사는 물론이고 노래패는 노래를 연극동아리는 공연을 올리며 그날을 기억했다. 4월의 교정은 민주주의를 공부하며 준비하는 장이었다. 그렇게 4·19는 젊은이들에게 소중한 역사이면서 또 빛날 미래였다. 독재정권의 탄압도 그걸 멈출 수는 없었다. 그런 4·19가 사라졌다. 4월이 되었지만 ‘진달래’를 들을 수 없다. 교정을 둘러보았지만 기념집회는 고사하고 다른 행사를 알리는 선전물도 보기 힘들다.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낀다” 했지만 깃발은커녕 교정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취업 특강 현수막뿐이었다. 4·19가 그렇게 대학생들의 기억 속에서도 사라지고 있다. 안타깝다. 수업 시간에 4·19 행사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었는데 한 학생이 “우린 취업 준비하기도 힘들어요”하면서 88만원 세대에게 4·19를 기억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무리라고 했다. 다른 학생들도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그리고 “요즘 대학생들은 선생님 때처럼 정치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역사를 기억하는 일을 정치적인 것으로 생각하며 멀리했다. 답답한 마음에 학생들과 뜻하지 않은 정치 토론을 벌였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지난 19일에는 대학로와 신촌을 지나는 10대, 20대 젊은이 30명을 붙잡고 4·19를 아느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대부분 “잘 모른다”였다. 개중에 안다는 이가 몇 명 있었지만 제대로 알고 있지 않았다. 5·18과 헷갈리는 이도 있었으나 그건 그나마 다행이고 어떤 이는 박정희의 쿠데타로 알고 있었다. ‘헉’ 소리가 절로 났다. 눈앞에서 “4·19는 박정희의 쿠데타 아닌가?”소리를 듣게 되니 눈앞이 깜깜했다. 결국 4·19를 정확히 알고 있는 이는 오직 1명뿐이었다. 길에서 무작위로 물은 게 정확한 통계일 수는 없다.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이 대체로 4·19를 모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그게 현실이었다. “역사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니 “역사 속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느니 하는 말은 팍팍한 현실에 몰려 있다고 생각하는 지금의 젊은이들에게는 이상적인 구호처럼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답답했다. 그날의 의로운 투쟁이 있은 지 50여년이 흘렀다. 그러는 동안 4·19 정신을 짓밟은 두 번의 군사 쿠데타가 있었고 4·19를 계승하는 5·18과 6·10 항쟁이 있었다.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에 많은 이들이 꽃다운 목숨을 바쳤고 그리하여 이제는 쿠데타와 부정 선거는 꿈도 꿀 수 없는 시대를 누리고 있다. 여전히 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지만 절차적 민주주의를 부정할 수 없는 시대에 살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4·19를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전쟁의 폐허를 딛고 민주주의를 일구어 냈던 지난 역사에 대한 예의이며 2만달러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해야 할 몫이다.김조광수/청년필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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