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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훈/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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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국사회
삶이 흔들릴 때가 있다. 기습처럼. 20대였던 시절, 만신창이가 되는 술자리로도 달랠 수 없는 기습의 순간이 오면, 삶의 모범으로 삼는 선생님의 책을 꺼내어 읽고는 용기를 냈었다. 이제 마흔을 앞둔 나이. 세상의 온갖 욕심으로 미혹한 나는 더 많이 흔들린다. 변한 것이 있다면, 이제 나를 일으키는 것은 책이 아니어야 한다고 믿는 정도다. 삶의 현장에서 드러나는 슬픔과 분노의 힘이 내게 방향을 보여주길 바란다. 적어도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전해주신 대로, 머리에서 가슴까지, 그리고 가슴에서 발까지는 참으로 긴 여행인 모양이다. 이랜드 사건이 그렇다. 이랜드 사건으로 드러난 삶의 진실이 내 주머니 속의 송곳이 되어, 나의 무딘 의식을 일깨우는 각성으로 계속되길 바란다고 다짐했었다. 이랜드 노동자들의 저항을 통해 드러난 우리 사회의 ‘불편한 진실’을 기억하겠다고 했었다. 그러나 그 다짐은 가슴으로, 다리로 내려오지 못했고, 이제 머리에서마저도 아득하다. 지난 4월17일로 이랜드-뉴코아 비정규 노동자들의 싸움이 300일을 넘어섰다고 한다. 평범한 삶의 자리에서 법의 모순을 벌거벗겨 드러낸 비정규직 투쟁의 상징. 지난해, 그들의 고단한 미소가 슬픔과 분노가 되었을 때,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내 양심도 조금씩 움직였고, 같이 아파했었다. 그러나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들은 여전히 헐벗은 삶의 현장에서 힘겹게 삶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더는 이전처럼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고, 귀 기울이지 않았다. 이 시대의 뜨거웠던 상징은 그렇게 내게 잊혀져가고 있었다. 나와 세상이 떠들썩했던 관심을 거두어 이랜드 노동자의 슬픔과 분노를 잊어가고 있을 때, 대선과 총선으로 무늬만 바뀐 세상은 ‘법의 지배’를 강력하게 선언하고 나섰다. ‘떼법’, ‘정서법’을 청산하겠다고 하고, ‘불법에는 관용이 없다’고도 한다. 마침 4월25일 ‘법의 날’을 맞아 정부가 선전하는 ‘법의 지배’는 시민들의 준법정신을 고취하는 행사들로 요란하다. 그러나 법에 의해 왜곡되는 삶을 외면하고 선언되는 ‘법의 지배’는 위선이다. 삶을 살핌으로써 법을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부당한 법으로 삶을 강요하는 ‘법의 지배’는 거짓이다. ‘떼법 청산’이라는 권력의 시선으로는 삶도 법도 제대로 살필 수 없다. 삶의 구체성을 돌아보며, 권력을 경계하는 법, 그러한 법의 적용만이 자의적인 권력행사를 제한해 온 시민들의 무기로서의 ‘법의 지배’라고 할 수 있다. ‘벌거벗은 법’을 문제시하며, ‘헐벗은 삶’을 걱정하는 성실한 고뇌가 필요하다. 삶의 구체성은 언제나 법보다 우선한다. 법과 정의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에 대하여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구체적인 삶과 사회적인 의미를 살필 수 있어야 하겠다. ‘비정규직보호법’이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자 터져 나온 이 시대의 모순과 위선들을 삶의 진실로서 맞서고 있는 많은 이들, 이랜드-뉴코아, 기륭전자, 코스콤 비정규직 노동자, 그리고 주목 받지 못한 현장의 노동자들에게, 기억하지 못해서, 너무 쉽게 자주 잊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이 사회가 당신들의 상처에 크게 빚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 상처의 증거를 통해서 좀 더 나은 세상으로 건너가는 희망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미안하고, 또 감사하다. ‘벌거벗은 법’과 ‘헐벗은 삶’의 사이에서, 봄날은 너무 빨리 만개해버리고, ‘법의 지배’와 ‘법의 날’은 소문으로만 오고 있다.정정훈/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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