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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5.14 19:54 수정 : 2008.05.14 19:54

정정훈 변호사

야!한국사회

역사는 되풀이된다. 한번은 비극으로, 그 다음은 희극으로. 1991년과 2008년의 배후론은 그렇게 되풀이되고 있다.

1991년 5월, 강경대가 집회 도중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터지자, 정권의 폭력에 저항하는 젊은이들의 분신이 이어졌다. 그때 정권의 위기를 구출한 것은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는 배후설의 등장이었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다”는 식의 전형적인 음모론의 제기. 언론과 정권, 사법 권력은 이 배후설을 증폭해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을 만들어내고, 위기정국을 돌파해 낸다. 16년이 지나서야 때늦은 진실이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진실을 조작하는 권력의 배후에서 음모의 징후를 무기력하게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시대에 깊은 상처를 낸 역사의 비극이었다.

2008년 5월, ‘백골단의 부활’이 논의되는 상황에서, 다시 ‘촛불’의 배후를 캐는 언론과 수사기관이 움직인다. 그러나 이제 역사는 더는 비극으로 되풀이되지는 않을 것이다. ‘빨간 배후’를 찾는 시대착오적 코미디가 되풀이되고 있다는 사실을 몇몇 ‘어두운’ 언론만 모를 뿐이다. 리모컨 들고 배후에서 조종하는 방식으로 대중은 움직이지 않는다. 배후 조종은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일 뿐, 지금 촛불을 들게 하는 것은 시대의 어둠 그 자체다.

한편에서는 촛불을 든 10대를 새로운 세대로 제시하는 분석이 진행 중이다. ‘88만원 세대’와는 구별되는 ‘2.0세대’론이 그것이다. 물론 이번 10대들의 등장은 분명 희망의 증거다. 그러나 그 희망을 설명하는 방식이 반드시 20대와 10대를 잘게 나누고 차이를 부각함으로써, 10대에게서 집중적으로 희망을 발견하는 방식의 ‘세대론’이어야 하는지는 점검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88만원 세대’와 ‘2.0세대’를 차별적으로 범주화하는 근거로서 제시되는 것은 인터넷 세대와 ‘쌍방향 유시시세대’라는 차이, 그리고 부모가 386세대인가 475세대인가라는 정도의 차이다. 그러나 ‘네트워크’ 정보사회라는 공통의 기반이 존재하고, 조기교육, 영어열풍, 입시 위주의 과잉교육과 연결된 부동산 투표에서 386세대가 결코 자유롭지 않았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2.0 세대론’이 제시하는 차이의 근거가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 것인지는 쉽게 공감이 되지 않는다. 다만 존재하는 차이라면, 고용 불안정이 현실의 문제인가 아니면 연기된 현실의 문제인가라는 점, 그리고 지금의 10대가 ‘잃어버린 10년’을 이야기하는 보수 정권 집권 시기에 중·고등학생 시절을 보내고 있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촛불을 들게 하는 것이 시대의 어둠이라면, 한 ‘세대’의 특징을 만들어가는 주요한 흐름도 ‘시대’의 사건들일 것이다. ‘88만원 세대’라는 상징의 비관적 뉘앙스가 다른 세대론을 만들어내어 거기서 희망을 발견하려는 경향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작은 차이에 주목하는 분절된 세대론보다는, 시대의 상징이 된 ‘88만원 세대’라는 문제의식을 더 넓고 정교하게 벼리는 방향이 타당해 보인다. 고용 구조의 문제를 세대간 갈등의 틀로 설명하는 방식에는 비판적 유보가 필요한 것으로 보이지만, ‘88만원 세대’론이 풍부하게 설명하는 20대의 고용 현실로부터 우리는 이미 많은 통찰력을 얻은 바 있다.

이제 사회는 촛불을 든 10대들에게서 희망을 발견하고 있다. 문제는 그 희망을 어떻게 ‘88만원 세대’ 전체, 불안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확장할 것인가에 있다.

정정훈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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