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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5.21 19:02 수정 : 2008.05.21 19:02

김미영 고려대 사회학과 강사

야!한국사회

대구 초등학생 집단 성폭력 사건에 대해 교육과학기술부가 거의 한 달 만에 내놓은 대책은 전국적인 학교 성폭력 실태 조사와 함께 보건교사와 전문 상담교사 등을 확대 배치하고, 아이들이 인터넷·유선방송 등을 통해 음란물에 노출되는 것을 막는 기술적 방도를 강화한다는 것이다. 교과부 대책뿐 아니라 사건 이후 나온 이야기는 대부분 이것이 성폭력 사건이니 원인은 성교육이 미흡한 것이고 방지나 처방은 성교육 강조라는 일종의 순환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고 늘 공공의 적은 ‘포르노’다.

‘요즘 애들이란’ 담론은 때로는 매혹과 아부로(“한 손에 촛불을, 다른 한 손으론 휴대폰 문자로 갈 길을 알려주는”), 때로는 몰이해와 매도로(“네 가지 없는 것들”) 나타나는데, 사는 환경을 구성하는 물건들이 첨단화되고 그것이 관계의 양상을 바꾸었다고 해도 사람살이의 본질은 비슷할 것이다. 무슨 기술 결정론자도 아니고 말이지. 부모 세대(남자)가 청계천에서 구한 빨간책을 돌려보고 <선데이서울>을 훔쳐보며 자랐다면, 요즘(남자)애들은 극사실주의의 동영상을 보며 자란다. 문제는 포르노인가.

10대 초반의 사내아이들이 무슨 섹스 머신도 아니고, 성욕을 주체할 수 없어 벌건 대낮에 학교 안에서 집단적으로 성폭력을 저지른 것이 아니잖은가. 그것이 성폭력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성폭력은 ‘성’ 폭력이고 성 ‘폭력’인데 초·중등생들이 걸려 있는 이 경우 방점은 폭력에 찍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저들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나쁜 방법으로 다른 사람을 공격하고 모욕하고 벌 준 것이다. 그러면서 권력을 과시하고 주먹서열을 다진 것이다.

문제는 유해 사이트이고 성인 오락물인가. 섹슈얼리티 강의를 수년째 하는 나는 지인들로부터 전에 없이 버벅대는 전화를 받을 때가 있는데, 고만한 아이들을 둔 부모의 걱정 태반이 ‘우리 아이가 … 포르노를 … 보는 것 같은데 … 어떻게 … 해야 할까?’다. 일찍이 야동순재님의 거침없는 활약도 있었고, ‘음지를 벗어나 양지’로 커밍아웃하여 명랑야동이나 포르나 등으로 거듭난 문화가 일각에 있지만 대부분의 (전통적^^;;) 야동은 10대 초의 야들야들하고 침윤성 강한 정신에 위험한 것일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위험할 수 있는 것은 야해서가 아니라 사람 사이의 (성적인) 관계에 대해 아주 나쁜 시각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에 노출되는 시기를 늦추고 노출량을 줄여야 한다는 발상은 일면 자연스럽다. 그러나 아무리 차단에 심혈을 기울이고 레이더망을 24시간 가동시켜도 아이는 언젠가는 곳곳에서 자의 반 타의 반 거기에 노출될 거다. 그렇다면 관건은 아이들의 판단력이다.

필요한 것은 인간관계 교육이다. 성욕은 식욕이나 수면욕 같은 본능적 욕망이지만 다른 것들과 달리 필시 또하나의 몸이 관련되고, 그 몸은 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불가분한 몸이니 성은 인간에 관련된 일이다. 그렇다면 성교육은 무엇보다 인간관계 교육이어야 한다.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된다고, 성이든 먹고사는 문제든 사람이 사람을 물건이나 장난감인 양해서는 안 된다고 결연히 가르쳐야 하지 않는가. 그것이 제대로 먹힐지는 아이들의 분노와 소외감을 어루만질 인간적인 사회를 향한 어른들의 노력일 것이다.

제대로 된 성교육 한번 받아본 적 없는 ‘야한’ 어른들이 ‘성’에 짓눌려 그 뒤에 달린 ‘교육’을 미처 돌보지 못하니, 참으로 기초적인 성교육은 멀기만 하고 포르노그래피는 반면해결사(?)로 주야장천 활용되고 있다.


김미영 고려대 사회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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