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6.04 19:33
수정 : 2008.06.04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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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훈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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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국사회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법전에 갇혀 있던 헌법 제1조가 촛불과 함께 거리에서 빛나고 있다. 실질적인 ‘국민’ 주권이 선언되는 이 유쾌한 정치의 시간에 잠깐 호흡을 가다듬고 생각해 보고 싶은 문제가 있다.
‘국민’의 자격이 없고 선언할 주권을 갖지 못한 사람들, 난민들의 문제가 그것이다. 흔히 20세기를 ‘난민의 세기’라고 한다. 러시아 혁명과 양차 세계대전, 베트남 전쟁과 코소보의 인종청소에 이르기까지, 혁명과 전쟁으로 관철된 20세기는 수많은 난민들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난민 문제에 대한 국제적 대응은 초라했고, 위선적인 것이었다. 난민을 인정하는 인도주의적 근거는 정치적인 동기로 가려지곤 했다. 대표적인 예가 아이티 난민과 쿠바 난민을 차별하는 미국의 정책이다. 미국은 1991년 아이티 쿠데타로 발생한 대량 난민에 대해서는 관타나모에 수용하거나 해상에서 바로 본국으로 송환한 반면, 같은 배에 타고 있던 쿠바인들은 난민으로 받아들였다. 현재까지도 ‘젖은 발, 마른 발’ 정책을 통해 미국 본토에 입국한 모든 쿠바인들을 심사 없이 난민으로 인정한다. 인권 문제를 정치 도구화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난민 문제의 양상이 변화하면서, 피난처의 장벽이 더욱 견고하게 높아지고 있다. 갈등과 분쟁이 국지화하면서 국경을 넘지 못하는 국내 난민이 급격히 증가하고, 테러 방지를 명분으로 국경에서의 무차별적인 단속과 구금이 자행되고 있다. 박해를 피해 온 난민들을 불법 이민자로 간주하여 강제추방하거나 보호소에 수용하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난민 문제에 대한 더 근본적인 비판은 인권 개념 자체에 대한 것이다. 그 자신이 망명자였던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1951년)에서 이 문제를 지적한다. ‘인권’이라는 개념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인 인간’에 근거를 둔 것이었고, 시민의 권리와 구별되는 ‘인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인권’은 ‘국민의 권리’와 동일한 것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국민’이나 ‘시민’이 아닌, 그저 ‘인간에 불과한 사람들’인 난민에게는 ‘인권’도 근본적으로 박탈되었다는 것이 그가 제기하는 비판의 핵심이다.
여성운동·민권운동·노동운동 등 공적 투쟁의 역사를 거쳐 ‘인간’과 ‘인권’의 개념은 오늘의 해석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전히 현실적으로 ‘인권’은 ‘시민권’의 잔여 개념에 가깝다. 아감벤의 지적처럼, ‘누가 독일인인가?’(그리고 누가 독일 시민이 아닌가?)를 묻는 질문이 바로 나치즘의 과정이기도 했다. 국민(시민)의 자격이 없는 이방인에게 인권은 벽에 걸려 감상의 대상이 되는 좋은 그림에 불과하기 쉽다.
난민 문제는 국민국가 체제의 아킬레스건이다. 그 문제 제기가 근본적인 만큼 손쉽고 빠른 해답이 있을 수는 없다. 단지 인간과 국민·시민의 관계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그 경계를 새롭게 구성해 가는 길고 어려운 과정이 놓여 있음을 알 뿐이다.
난민 문제는 한국사회가 동아시아 민주주의와 인권의 확산을 위한 보편적 리더십으로 역사에 기여할 수 있는가를 가늠하는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다가오는 6월20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난민의 날’이다. 10만개의 불꽃으로 타오른 ‘국민’ 주권의 선언이, 87년 6·10 항쟁의 ‘시민’ 정신을 거쳐, 난민의 날이 상징하는 ‘인간’의 문제로 확장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질문의 시작은 ‘국민’일지라도, 그 정신의 끝은 ‘인간’이었으면 좋겠다.
정정훈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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