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10.13 20:32
수정 : 2008.10.13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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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교육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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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국사회
퀴즈를 내보겠다. 다음 중 ‘평준화’의 정확한 의미는? ①무시험 학교배정 ②교육재정 균등지원 ③획일적 교육과정 ④학력 균일화(이른바 ‘하향평준화’ 담론에서). 이 네 가지는 엄밀히 보면 서로 독립적인 것인데, 언제부터인가 이것들이 모두 ‘평준화’라는 동일한 용어에 담기게 되면서 소모적인 ‘개념의 헛바퀴’를 돌고 있다.
좌파는 대개 평준화를 ①이나 ②의 의미로 여겨 이를 지키려 하고, 우파는 ③이나 ④로 여겨 이를 척결하려 한다. ‘평준화’가 특히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지게 된 것은 ③, 즉 ‘획일화’ 의미로 쓰이면서부터다. 사람들이 ‘붕어빵식 교육’이라는 표현으로 우리나라 교육을 자조한 지는 상당히 오래됐고, 서태지가 <교실 이데아>로 이를 풍자한 지도 10년이 훌쩍 넘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보수언론과 한나라당은 평준화를 ‘획일적된 교육’이라는 의미로 규정하여 비판하면서 은근슬쩍 ①과 ②까지 도매금으로 넘겨 버리기 시작했다.
‘평준화’라는 개념을 어떻게 쓰든, 좌파와 우파 모두 우리나라의 교육과정이 지나치게 획일적이고 경직되어 있다는 데는 의견이 일치하는 셈이다. 선진국에서는 중·고교 수업에 폭넓은 선택의 기회를 부여하여 학생들의 필요와 재능에 따른 교육이 이뤄지도록 하고 있다. 교육경쟁력 1위인 핀란드의 경우 중학 과정의 20%가 선택과목이며 고등학교는 아예 무학년제로 운영한다. 미국만 해도 수능(SAT)에서 필수과목은 최소한도이고(필수과목 수학은 거의 우리나라 중학교 수학 수준이다), 그 대신 광범위한 선택과목 시험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얼마 전 정부가 수능의 ‘수리 나형’에 미적분을 포함시킬 방침이라고 밝혔다. 수능 수학에는 이과생을 위한 ‘수리 가형’과 문과 및 예체능 학생들을 위한 ‘수리 나형’의 두 가지가 있는데, 2005학년도 대입부터 ‘수리 나형’에는 미적분이 제외돼 있었다. 그런데 이를 다시 복원시키려는 것이다. 말하자면 대학에서 뭘 전공하든 상관없이 무조건 미적분을 공부하라는 얘긴데, 한마디로 시대착오요 이명박 정부의 교육철학을 비웃게 만드는 일이다. 이명박 정부가 한편으로 ‘무시험 학교배정’이라는 의미의 평준화는 급격히 허물어뜨리면서, 다른 한편으로 ‘교육과정의 획일화’라는 의미의 평준화는 안간힘을 쓰며 오히려 강화하고 있는 꼴이다.
물론 2005학년도 대입부터 적용된 7차 교육과정에서, ‘수리 나형’에 미적분을 제외한 결과 여러가지 부작용이 나타났다. 편법으로 수리 나형을 치르고 이공계 학과로 진학하여 ‘미적분 모르는 공대생’이라는 오명을 얻는 학생이 증가한다든지, 대학에서 경제학 개론 수업을 하는데 학생들이 미적분을 모르니 대학교수가 진땀을 뺀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전자의 경우 대학 쪽에서 이공계 지원자는 필수적으로 ‘수리 가형’을 치르도록 의무화하면 간단히 해결되는 일이고, 후자는 상경계열 전공자를 염두에 둔 별도의 미적분 교육 프로그램을 고교 또는 대학에서 제공하도록 하면 될 일이다.
물론 교육과정과 수능제도를 유연화하려면, 과목별로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가진 사범대 교수들, 교사들, 교육관료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한다. 이것이 귀찮고 피곤해서일까? 이 정부는 이 모든 부담을 학생들에게 떠넘겼다. 피아노나 국문학을 전공하려는 학생도 필수적으로 미적분을 공부하라는 것이다! 현 정부는 이미 ‘학교 자율화 조치’라는 미명 아래 0교시·우열반 등을 부활시켜 학생들을 피곤하게 만든 바 있다. 피곤함을 약자에게 전가하는 것, 이것이 이 정부의 주된 특기인가.
이범/교육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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