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범 교육평론가
|
야!한국사회
2000년대 이후 정부가 내신 반영비율을 높일 것을 요구하자, 대학들은 내신성적에 잔뜩 기본점수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예컨대 ‘명목’ 반영비율은 40%인데 모든 학생들에게 36%를 기본점수로 줘서 ‘실질’ 반영비율을 4%로 낮추는 식이다. 이게 내신성적이 불리한 강남권 학생이나 특목고생을 고려한 처사였음은 불문가지다. 사정이 이러니 학생들에게 설명하기도 난처했다. “얘들아, 대학 쪽이 발표하는 반영비율을 믿어서는 안 된다. 너희들이 야간 ‘자율’ 학습하는 게 자율이 아닌 것과 비슷하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대학이 학생선발 자율권을 가지게 되면서, 여러 가지 우려에도 적어도 한 가지 위안되는 일이 있었다. 이제는 대학과 정부의 숨바꼭질이 종말을 고하고, 대학 쪽이 학생선발 기준을 솔직하게 드러낼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고려대가 수시 2학기 일반전형의 1, 2단계에 걸쳐 이런 기대를 참담하게 저버렸다. 고려대는 1단계(정원의 15~17배수 통과)에서 학생부 교과영역(내신성적) 90%, 비교과영역 10%를 반영한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뚜껑을 열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내신성적이 불리한 특목고 학생들이 무더기로 통과하고, 일반고에서도 내신성적이 훨씬 뒤떨어지는 학생이 내신성적이 높은 학생을 제치는 일이 속출했다. 일각에서는 노골적인 고교등급제를 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내신성적에 엄청난 기본점수를 주는 등의 방식으로 변별력을 낮추고 비교과영역(토플점수·경시대회 성적·학생회 직위 등)에 세밀한 변별적 점수를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교과영역 10%, 비교과영역 90%’로 적어야 마땅한 것을 ‘교과영역 90%, 비교과영역 10%’라고 발표해 수험생을 기만한 것이 고려대의 1단계 사기극의 요체인 것이다. 그런데 같은 전형의 2단계에서 다시 사기극이 벌어졌다. 자연계열(이과) 논술이 본고사형 문제로 채워진 것이다. 여태까지 여러 대학의 자연계열 논술에서 표준적인 풀이과정과 정답이 뻔히 존재하는 본고사형 문제가 일부 섞여나온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고려대의 경우만큼 본고사형 문제로 도배된 적은 없었다. 앞으로는 학생들에게 “얘들아, 대학 쪽이 본고사를 보지 않겠다고 발표하는 것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얘기해야 할 판이다. 이런 사기극에 대한 고려대의 태도는 충격적이다. 고려대는 1단계 사기극에 대해서는 ‘우리는 잘못한 게 없다’, 2단계 사기극에 대해서는 ‘본고사가 아니다’라고 우길 뿐이다. 현직 대통령을 배출한 명문학교다운 소신 있고 책임감 있는 입장표명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내년에는 어떻게 될까? 본고사 논란은 어차피 한번 거쳐야 할 홍역으로 여기고 정면돌파할 가능성이 높다. 대학별 본고사나 논술고사를 치르는 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나라들 중에 일본과 우리나라밖에 없다는 점은 철저히 숨길 것이다. 고려대로서는 ‘지맘대로’ 뽑는 게 중요하지, 사교육비가 어쩌고 사회적 공정성이 저쩌고 하는 건 남의 나라 일일 테니까. 내신 반영비율 문제는? 작년까지 시행한 ‘논술+학생부 합산제’로 돌아감으로써 시비를 예방할 가능성이 높다. 작년까지 고려대는 1, 2단계를 거치지 않고 학생부 교과영역(내신성적), 비교과영역, 논술고사 성적을 합산해 합격자를 뽑았다. 따라서 대학 쪽이 꼼수를 벌인다는 의심이 들어도 ‘논술고사 성적이 낮아서 떨어졌겠지’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었다. 고려대가 자신들의 꼼수를 숨길 수 있는 합산제로 회귀할 것이라는 데 백만원 건다. 내기에서 지면 고려대 학교발전기금 계좌로 백만원을 송금하겠다.이범 교육평론가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