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12.08 19:52
수정 : 2008.12.08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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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정 르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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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국사회
의문이다. ‘세계 최고의 품질과 기술력’으로 ‘첨단선박’을 만드는 ‘21세기 초일류기업’에서 8년을 일한 ‘종업원’은 왜 이른 새벽 현장사무실 외벽, 부식물을 싣는 승강기 난간에 줄을 묶었을까. ‘자주적이고 민주적으로 단결’하여 ‘민주사회의 노동자로서 인간다운 생활’을 하게 한다는 규약과 ‘헌법 및 노동관계법의 기본 정신에 입각’하여 ‘인간다운 삶을’ 누리게 한다는 단체협약을 지닌 노조의 ‘조합원’은 왜 그 줄을 목에 감은 채 아래로 몸을 던졌을까. ‘12년 연속 무분규 상생의 모범적 노사문화’가 꽃피었다는데 그 ‘노동자’는 왜 회사가 “감시·탄압·억압”한다는 말을 했을까. 불현듯 1980년대에 불렀던 ‘강제와 감시 속에 우울하고 고통에 찬 … 짓누르는 억압의 사슬을 끊으려다 … 탄압을 물리치고 굴레를 깨어버려’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경제 위기와 실업 위협이 모든 이에게 입 닥치고 알아서 기라고 으름장을 놓는 시절에 이런 의문은 배부른 소릴까.
11월14일 현대미포조선에서 벌어진 일이다. 정규직 노동자인 이홍우씨가 바란 건 내주하청 용인기업 노동자들을 어서 복직시키라는 거였다. 지난 7월에 대법원은 “현대미포조선과 근로계약 관계가 있다”며, 부산고법이 내렸던 종업원 지위확인 패소 판결을 파기환송했다. 용인기업은 미포조선이 설립된 지 3년 뒤인 1978년에 생겼다. 용인 노동자 30명은 해고 기간까지 따져 20~30년을 “미포에서 완전히 청춘을 다 바친” 사람들이다. 정년까지 일하다 “아침 10시가 되면 조용히 날아가 버리는 안개처럼” 사라지고 싶었던 늙은 노동자들은 외주화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회사에서 쫓겨나 근 6년을 고통 속에서 살았다. 회사는 노동자인 자신들이 “생각하는 거와 엄청나게 다르다”는 걸 뼈저리게 확인한 시간이었다. 지난 5일에는 서울행정법원에서 “부당해고, 원직복직”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옛날 그대로 들어가서 평범한 노동자로 살고” 싶은 꿈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늘 기다리는 자로 살아야 하는 노동자. 용인기업 노동자들에게 하루를 더 기다리라는 건 참 잔인한 일이다. 회사는 고법의 파기환송 재판이 남았다며 복직을 회피하고, 재판마저도 핑계를 대며 자꾸 늦춘다.
“노동을 해서 임금으로 사는 사람이 애들이 자라는 상황에서 쫓겨나갔어요. 노동자에게 해고는 너무 잔혹합니다. 고법 파기환송 되었다고 그 결과를 기다려서 들어온다고 하면 이게 일년이 걸릴지 더 걸릴지 어찌 압니까.” 이홍우씨를 비롯해 스무 명 남짓 정규직 노동자들이 점심시간마다 사내에서 용인 노동자 복직촉구 선전전을 한 이유다. 사회는 정규·비정규, 직영·하청으로 노동자들을 나누고 차별하나, 이들에게 노동자는 하나다. 하지만 선전전을 했다는 이유로 회사는 한 노동자에게 정직 1개월 징계를 내렸다. 몇 노동자에겐 잔업과 특근을 못하게 했다. 그리고 참가 노동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배에 올라 용접을 하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보면 딱 마주치게 되는 눈길들, 일을 관리·감독하는 조장·반장·팀장들이 어느새 노무관리까지 하고 있었다. 그이들도 같은 조합원이다. 이홍우씨는, 바깥에서는 잘 모르는 “사람의 목을 조르는” 듯한 노동현장에서 숨쉴 길을 찾고 싶었을까.
이홍우씨는 사고 나흘 만에 8시간에 걸쳐 1차 수술을 했다. 다음날 면회 온 동료한테 필담으로 며칠이냐고 묻더란다. 19일이라고 알려주니 눈을 꾹 감더란다. 감은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참 뒤 수첩에 적은 말, “18일이 결혼기념일이었다.” 그이는 살고 싶어서, 어떻게든 살고 싶어서 두려운 길을 걸었던 게다.
박수정 르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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