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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2.31 19:11 수정 : 2008.12.31 19:13

정정훈 변호사

야!한국사회

국회의장의 질서유지권 발동. 파국의 문을 열지 말라는 진지한 경고는 결국 묵살되었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근본에서부터 훼손할 ‘불량법률’의 대량 제조가 초읽기에 들어갔다. ‘속도전’을 요구하는 청와대의 주문이 있었고, 한나라당은 납품기일에 맞춰 공정을 재촉했다. 입법전쟁을 선언하고, ‘받들어 총’ 대신 ‘받들어 법’으로 대통령의 의중을 모셨다. 국회는 이제 ‘불량법률’ 제조공장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해 있다.

한나라당이 직권상정을 요청한 85개 중점처리 법안 중 45개 법안이 최근 1주일 사이에 제출된 ‘졸속 입법’이고, 그중 상당수가 사회적 논란을 피하기 위해 정부 입법 절차를 무시한 정부 청탁의 의원입법이라고 한다. 민주당은 이를 ‘청부입법’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한 바 있다.

치명적 결함을 지닌 이 불량법률들을 그저 ‘악법’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충분할까? 법의 특징은 사회적 동의를 기반으로 강제력을 지닌다는 점에 있다. 시민에 대한 국가의 강제력(폭력) 행사가 정당화되는 것은 사회적 동의를 전제로 한 법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법의 지배’라고 부른다. 간단한 공식으로 설명하면 이렇다. “법=동의+강제력” 그렇다면 사회적 동의 절차가 무시된 법은? 답은 자명하다. 폭력이다. 동의 없는 강제력은 법률의 형식을 취하더라도 폭력이라 해야 마땅하다. 이 기회에 분명히 하자. 악법은 법이 아니다. 그리고 동의 없는 악법은 폭력에 불과하다.

왕정, 절대군주정의 시기에는 말씀이 곧 법이었다. 민주주의가 공고화되었다는 오늘날, 말씀을 ‘받들어 법’을 만드는 현상, 법의 명분으로 민주주의의 토대를 허무는 현상을 무엇이라 일컬어야 하나. ‘법의 독재’ 말고는 적절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눈앞에 펼쳐지는 법의 독재는 파국의 다른 이름이다. 2008년 여름, 연인원 수백만에 달하는 촛불대중이 한목소리로 외친 ‘쇠고기 재협상’ 요구는 철저히 무시되었다. 솥뚜껑 보고 놀란 가슴으로, 시민들의 주권행사 가능성을 제한하려는 것이 이번 입법전쟁의 중심 기획 중 하나이기도 하다. 촛불정국이 한창이던 당시에도 한편에서는 ‘정당정치의 활성화’를 요청하며 촛불의 귀가를 독려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결국 촛불이 사그라지고 정당정치의 공간이 열렸지만, 그 결과는 무엇인가? 법의 독재다. 국회는 있지만 정치는 없다. 대의정치로의 수렴은 없었다. 정치의 공백을 ‘수의 독재’가 메우고 있다. 직접·간접의 민주주의 모두 작동이 중지된 상태, 그 자체가 이미 파국이다.

곽병찬 논설위원이 지적하듯이 정권의 목적은 ‘장기집권을 위한 진지 구축’에 있다. ‘속도전’, ‘입법전쟁’과 같이 정권이 선택한 전쟁의 비유는 단순한 수사에 그치지 않는다. 역사전쟁에서부터 입법전쟁에 이르기까지, 그람시라면 ‘진지전’이라고 불렀을 전쟁, 과거-현재-미래를 규정하기 위한 보수정권 주도의 총성 없는 전쟁이 총체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국회만이 아니다. 교육, 역사, 노동, 언론, 경제 등 우리들 삶의 터가 온통 전쟁터이고 최전선으로 변해가고 있다. 시인 황지우는 1980년대를 두고 “막장이냐, 최전선이냐”를 물었다. 30년이 지난 지금, 그 질문은 다시 유효하다.

4년에 한번 쥐여지는 ‘종이 짱돌’(투표)을 기약하며 무력한 복수혈전을 다짐하기도 하고, 다시 촛불과 횃불의 등장이 예고되기도 한다. 어쨌든 막장의 절망만큼 허망한 것도 없으니, 이제 우리들의 분노가 변화의 방아쇠가 될 수 있을 것인가? 2009년 새해의 화두는 단연 이것이다.

정정훈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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