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1.19 20:58
수정 : 2009.01.19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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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정 르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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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국사회
지난 금요일, 대전 동구 청소년 자연수련관에 여자 백여명이 모였다. ‘땅을 사랑하는’ 여자들이 강원도 홍천과 횡성에서 시작해서 제주 서귀포에 이르기까지 골골샅샅에서 왔다. 20대부터 70대까지 나이도 다양하다. 땅을 사랑하는 이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 땅이 돈을 벌어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손에 흙먼지 하나 묻히지 않은 채 땅 문서 따위나 가지고선 도로가 나고 개발이 되어 돈이 불어나는 해괴망측한 일을, 이들은 기다리지 않는다. 대신 땅 깊숙이 발을 딛고 허리 굽히고 쭈그려 앉아 씨앗과 새싹과 열매에 끊임없이 눈길 주고 손길을 내민다. “쌀값이 떨어졌을 때 농민들 소득 보전용으로 지급하는 쌀 직불금”을 농사를 짓지도 않으면서 당당하게 가로채는 염치없는 작자들 때문에 가슴에 피멍이 들어도 다시 논으로 들로 나간다. 비료·사료·기름값이 올라 생산비가 폭등했지만 농산물값은 추락해 농가부채에 몸과 마음이 휘청거려도 “바보 같은 농사 / 포기할 수 없다”는 노래를 부르며 한 해 농사를 갈무리하고 다시 갈바래질을 준비한다. 나라는 애써 농민과 농업을 죽이고 식량주권을 포기해 왔지만, 이 여자들은 이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건강하고 안전한 먹을거리를 주겠다고 애쓰는 사람들이다.
눈 오는 날, 기차·버스·비행기를 타고, 승합차를 몰고 트럭을 몰고 온 이들은 전국여성농민회 총연합(전여농)의 30개 시·군 여성농민회 대의원들이다. 마을에서는 나주댁이니 고성댁 혹은 누구 엄마라고 불릴 테지만 널찍한 이름표에 지역과 자기 이름을 써 넣었다. 각 지역 대의원들은 자신들이 기르고 만든 귤과 떡, 사과즙을 가져와 사람들과 나누었다. 전북여성농민노래단 ‘청보리사랑’은 직접 만든 노래를, 거창여성농민회 ‘실버합창단’은 사람들에게 가곡을 들려주었다.
지난해 활동을 평가하고 올해 할 일을 계획하는 대의원총회 자리. 들어보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투쟁,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투쟁, 유전자 조작식품 반대투쟁처럼 싸워야 하는 일이 많았다. 토종씨앗 지키기 사업, 식량주권과 국민건강 지키기 운동, 지역 먹을거리 정책 생산, 대안농정 연구처럼 식량위기 시대에 농업이 갈 길을 고민하고 연구하는 일도 많았다. 전여농의 뿌리와 줄기인 시·군·면 여성농민회 회원들이 있기에 가능했다. 임원이어도 농사를 쉴 수는 없기에 서울과 제주·고성·횡성·구례 등에 있는 집을 오가면서 이 일들을 해냈다. 따져보면 “생명과 식량주권”을 지키는 일은 농민이 홀로 떠맡을 일이 아니다. 그동안 여성·남성 농민들이 서울로 올라와 농민대회를 하면 방송에서는 “교통이 혼잡했다”는 말로 농민들이 외친 ‘식량주권’ 문제를 감추고, 시민들은 무관심으로 농민들을 “여의도 한복판에서 외롭고 외롭게” 만들었다.
올해 전여농이 만들어진 지 20년이 된다. 자본주의·가부장제 사회에서 ‘천덕꾸러기’ 취급당하던 여성농민들이 ‘생산의 주인! 삶의 주인! 실천하는 여성농민!’을 표어로 내걸고 스스로 조직·교육·투쟁하고 정책을 만든 여성 농민운동 20년은 쉽게 흘러온 시간이 아니다. 어린아이를 둘러업고 산골에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여성들을 찾아다니며 힘 모은 운동이 이제 국제 연대운동으로 넓혀져 세계 여성농민들과 함께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선다. 그래도 그이들은 화려하고 거창하지 않다. 그날 행사가 끝나고 옥수수·조·수수 토종씨앗을 무슨 보물처럼 소중히 나눠 챙기는 그 모습으로 20년을 이어왔다. 씨 뿌릴 날을 설레며 기다릴 여자들. 그이들한테서 희망의 씨앗을 나누어 받자.
박수정 르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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