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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12.20 19:13 수정 : 2009.12.20 19:13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배 아프고 열이 나면 어떡할까요? 어릴 때 어디선가 배웠던 노래다. 병원으로 빨리 오라며 노래는 끝난다. 병원에서 일을 도운 적이 있다. 행려응급실이었다. 겨울이라 차가운 길거리에 쓰러져 있다가 실려 오는 사람들로 응급실은 늘 북적거렸다.

한 아저씨가 가슴 통증을 호소하면서 들어왔다. 식은땀이 비 오듯 흐르고 숨은 당장이라도 넘어갈 듯 밭았다. 병상은 이미 가득 차 있어 바닥에 매트를 깔고 그를 눕혔다. 급한 검사들을 하고 보니 폐암이었다. 거의 온몸에 전이된 말기 폐암이었고 그 아저씨는 일주일이 채 안 되던 날 돌아가셨다.

가슴이 아프고 숨이 찬 지는 오래됐다고 했다. 참다 참다 힘들면 약국에서 진통제를 사다 먹으면서 견뎠다고 한다.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된 그날, 그는 어디로 갔을까. 경찰서다.

건강보험증도 의료급여증도 없이 응급실을 이용하려면 사는 곳이 불분명한 ‘행려’라는 것을 경찰이 확인해줘야 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의료급여사업지침이 개정되면서 이걸로도 부족하게 됐다. 경찰이 응급진료를 받게 하더라도 부양의무자가 있는지를 다시 확인한 뒤 의료비가 지급된다. 거리에서 쪽방에서 몇 년째 연락도 끊겼을 ‘가족’이 치료비를 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병원들은 행려환자 받기를 더욱 꺼리게 됐다. 이제 경찰서 말고 어디로 가야 할까.

한번은 무릎이 퉁퉁 부어오른 아저씨가 응급실로 왔다. 염증이 생겨 벌겋게 부어오른 무릎에 기본적인 처치를 하고 나니 퇴원하겠다고 박박 우겼다. 의사는 며칠간 항생제 주사를 맞는 것이 좋겠다고 권했지만 통 말을 듣지 않았다. 먹는 약으로 처방받아 병원을 나갔던 그 아저씨가 다음날 새벽 화상을 입고 다시 병원을 찾아왔다.

본인 말로는 여의도 무슨 당사 앞에서 농성을 했다고 한다. 아마 건물 앞에서 소주 몇 잔 기울인 것이 농성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잠이 들었다. 새벽이 오면서 기온은 꽤나 내려갔을 테고 잠결에도 추워서 따뜻한 곳을 찾았을 게다. 불이라도 피운다고 전날 무릎에 감아준 붕대를 풀어 불을 붙였고 미처 다 풀리지 않은 붕대를 따라온 불에 덴 것이었다.

이슬을 맞고 한뎃잠을 잔다는 뜻의 ‘노숙인’이라는 말은 현실의 껍데기조차 충분히 핥지 못한다. 말이 중요한 건 아니다. 하지만 노숙인 정책이 ‘거리에서 쉼터로’라는 패러다임에 갇혀서 정작 그와 그녀들의 하루하루를 놓쳐온 것이 벌써 십년이 넘었다. 아플 때 병원에 갈 수 없고 퇴원해도 집에 갈 수 없는 그 하루하루들.

부랑인 시설이 거의 전부였던 십여년 전보다 노숙인 정책은 분명히 나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노숙인 정책은 누군가 빈곤의 끝자락에서 거리로 내몰려 나온 다음에야 시작된다. 최근 ‘홈리스’라는 말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정책의 시야를 넓히라는 주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이유가 이것이다. 유럽의 홈리스지원기구연합은 불안정한 임대나 퇴거 또는 가정폭력 등으로 위협받는 상황, 극단적인 과밀 등 부적절한 주거 상태도 홈리스로 규정한다. 거리에서 자는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누구라도 놓일 수 있는 특정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 그들을 바라보는 홈리스 정책이 필요하다.


매년 동짓날에는 ‘거리에서 죽어간 노숙인 추모제’가 열린다. 내일은 서울역 광장에서 홈리스 인권 실현을 위한 6대 요구를 알리며, 돌아가신 분들을 기린다. 저녁에는 동지팥죽을 끓여 함께 먹는다고 한다. 아플 땐 병원으로, 퇴원하면 집으로, 자고 나면 일자리로. 동지가 되기 위해 나눠야 할 뜻이 거창하지 않으니 팥죽 잡수러 한번 가보시라.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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