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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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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소에서 한나절 감리라는 걸 보는데 기장님의 두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믹스커피 한잔 마실래요? 내가 졸려 죽겠어서 그래요. 기장님이 건네준 달달한 커피를 냉큼 받아들며 물었다. 어제 잠 못 주무셨어요? 완전 악몽 꿨다니까, 내가 낼모레면 예순인데 아 글쎄, 군대를 또 가는 거야 내가, 누구 죽는 꼴을 보고 싶어 그러나, 내 아들놈도 방법 있었음 어떻게든 뺐을 텐데 빽이 있어 가진 게 있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커피를 후딱 삼키던 기장님이 종이컵을 구겨 쓰레기통에 던졌다. 골인, 아주 작은 목소리로 기계음 시끄러운 가운데 추임새를 넣어드리며 잠시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세상 참 불공평하구나. 딸만 둔 우리 부모 평생의 소원은 군대 간 아들 면회 한번 가보는 일이었는데, 통닭도 튀기고 김밥도 말고 보온병에 달인 홍삼도 담아 아들아, 어머니, 서로 꼭 껴안고 눈물바람 한번 일으켜보는 일이었는데. 요즘 들어 정말이지 인터넷을 켜기 싫다. 뉴스도 보기 싫고 신문도 읽기 싫다. 그렇게 싫으면 안 켜고 안 보고 안 읽으면 그만인데 출근하자마자 책상에 앉기 무섭게 클릭 한 방으로 온갖 말이란 말을 다 좇고 다니는 이유는 뭘까. 나는 이렇게 무사한데 간밤 여러분은 안녕하셨습니까, 한마디로 궁금해서다, 걱정되어서다. 나날이 사건사고는 예기치 못한 곳에서 가늠할 수 없는 넓이와 깊이로 벌어지고 그 틈에서 우리는 당하는 자인가 구경하는 자인가 매번 위치 선정의 순간을 맞닥뜨리게 된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안도와 절망의 시소게임… 아니나 다를까, 평소처럼 그저 하룻밤 자고 났을 뿐인데 배가 바닷속에 가라앉았단다. 나룻배도 아니고 오리배도 아니고 천이백 톤급 군함이 두 동강이 나서 바다 깊이 잠겨버렸단다. 지금 장난해? 빠졌으면 얼른 건져야지! 애들도 다 아는 이 단순한 논리가 실천되지 못하는 걸 보면 참으로 어려운 일임이 분명할 것이다. 왜 그러하지 않겠는가. 우주선 타고 우주인 되어 달나라도 가는 시대에 초기 대응 방법이 잠수복 입은 잠수부들의 목숨을 담보로 그들에게 기대는 것뿐인 걸 보면 말이다. 사정이야 어찌되었든 어쨌거나 중요한 건 배 안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젊음들이라는 사실이다. 얼마나 두려웠을 것인가. 얼마나 추웠을 것인가. 사건 발생 이후 천안함 관련 속보라는 기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뜬다. 그게 그렇대, 라고 누군가에게 말해주기 무섭게 그게 아닌가봐, 라고 말 얼버무려야 할 정도로 양상 다른 기사가 또 뜬다. 맹세코 나는 실없는 사람이 아닌데 누군가 자꾸만 나를 실없는 사람으로 만든다. 그게 화가 나고 신경질이 난다. 애초에 의심을 모르던 나에게 의심을 품게 한 건 그러니까 누군가의 거짓말이고 진실 그 너머란 얘기다. 연일 텔레비전에서는 이 일의 책임자라는 사람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석고대죄까지는 아니더라도 머리 숙여 면목 없습니다, 사죄의 큰절 한번은 기대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큰 욕심이었던 것 같다. 사실 우리만큼 죄의 사함과 용서의 미덕을 잘 발휘하는 민족도 드물지 않은가. 아들 없어 다행이라고 침 튀기며 말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뉴스 속보 중에 빠지지 않는 기사 한 줄이 여지없이 또 뜨고야 만다. 성추행, 강간범 도주, 검거. 어느 맑은 날 남산 꼭대기에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본 적이 있다. 교회와 성당과 절과 그 밖의 온갖 종교단체의 상징들이 곳곳에서 아주 빈번하게 솟아 있었다. 정말이지 들어가 묻고 싶었다. 대체 이 나라에서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거냐고. 답이 없어 노을이 지기에 술이나 마시러 갔다.
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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