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0.08.09 22:44
수정 : 2010.08.09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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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영 인디고 유스 북페어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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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폭염주의보가 내린다. 그나마 바다를 끼고 있는 부산에 살고 있어 불어오는 바람에 위안을 얻지만, 뉴스를 통해 보는 서울의 풍경은 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난다. 서울의 끓는 여름만큼이나 필자도 뜨거운 여름을 지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루 중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인디고서원(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서점)은 에어컨이 없기 때문이다. 보통 서점이 그렇듯 시원한 실내를 기대하고 들어온 손님들이 질색을 하며 돌아서는 모습은 이제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나 역시 선풍기 바람에도 불구하고 더위에 지쳐버린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절대적으로 많은 선진국들로 인해 생겨난 기후변화의 재앙은 그것에 대처할 사회 제반시설이 없는 지역에서 더 심각하게 일어난다. 이렇게 기후변화 요인의 생성지와 그에 따른 피해지역이 다른 것 자체가 불평등이다. 더 심각한 것은 환경을 오염시키는 당사자가 그 피해를 느끼지 못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그 상황을 악화시키며, 그로 인해 피해받는 사람들은 더 힘들어지는, 즉 불평등이 더 심화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모든 것을 갈아엎고 다시 원시의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 또한 이 지구의 일원임을 간과한 낭만적이면서 불가능한 주장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것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문제의 원인을 알면서도 이 지구는 더 뜨거워지고 있으며, 게다가 새로운 불평등이 보편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불평등은 국가 사이의 문제에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에어컨이 그것이다. 실내가 시원하면 그만큼 실외는 즉각적이면서 장기적으로 더 더워지기 마련이다. 에어컨으로 시원함을 즐기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더위에 시달리는 쪽방촌을 상상할 수 없고, 실외기의 뜨거운 바람을 맞아야 하는 바깥 행인들의 불쾌감에도 무감하다. 자본의 총화로서의 은행과 백화점 같은 공간은 바깥 기온이 올라갈수록 더 강하게 에어컨을 가동하고, 이는 바깥 온도를 더욱 높이는 악순환에 빠진다. 에어컨은 그나마 불어오는 바람에 더위를 식히던 기층민중들의 시원함마저 강탈하는 도구다. ‘그들’의 고통이 곧 ‘나’의 쾌적함이 되는 정글의 법칙이 이 더운 여름 에어컨에서마저 작동하는 것이다. ‘그들’의 고통스러운 더위보다 ‘나’의 쾌적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기적인 욕망 때문에 불평등의 간극은 점점 더 커진다.
그러나 ‘나’라는 개인은 단 한 번도 개인으로만 존재한 적이 없다. 우리 모두는 과거를 안고 태어나며 미래를 향해 걸어가는, 그리고 현재 지구공동체의 일원으로 태어나서 살아가는 존재다. 나의 삶이 더 큰 삶 속에 속해 있는 것을 인식한다면, 타인을 무더위에 시달리게 하는 에어컨의 시원한 바람은 처음부터 ‘나’의 것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에어컨을 사용하는 것은 이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옳음의 문제이고 정의의 문제인 것이다.
버튼만 누르면 죽을 것 같은 무더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 나에게 주어진 것 같은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것을 그만두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우리 모두가 공유해야 할 세계에 대한 책임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에어컨의 쾌적한 바람이 어느 순간 불편해지는 때가 올 것이다. 그렇다. 지구라는 하나의 공동체에서 어느 누군가만 시원할 수 있는 자유라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에어컨보다 선풍기로, 선풍기보다 부채로 더위를 식히는 것이 바로 공동선의 실천이다. 불평등한 세상을 바꾸는 것이 부채 하나로도 당장 가능한데, 기꺼이 부채를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윤영 인디고 유스 북페어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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