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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8.11 21:37 수정 : 2010.08.12 11:07

김민정 시인

연일 폭염이다. 이맘때마다 텔레비전에서든 라디오에서든 이 계절의 주제가처럼 흘러나오는 노래가 있다. 흥에 겨워 여름이 오면 가슴을 활짝 열라던 바로 그 <여름> 말이다. 한양대 노래모임 ‘징검다리’가 부른 것으로 기억하는데 검색해보니 1978년 TBC 해변가요제 대상곡이다. 지금으로부터 32년 전의 노랫말과 멜로디인데 신기하게도 부를 때마다 오늘의 유행가처럼 박자에 맞춰 고개 까딱거리게 된다. 나이 불문하고 각자 가장 순정했던 한 시절로 돌아가 청춘의 입 모양을 그리게 한다. 여름은 젊음의 계절, 여름은 사랑의 계절이라지만 나는 요즘 이 노래에 종종 토를 단다. 과연 그래? 그럴까? 세상에 이럴 수 없는 일이 세상에 이런 일로 팡팡 터지고 있는 요즘, 나는 자다가도 벌떡 깰 때가 많아졌다. 더워서가 아니다. 두려워서다.

어느 날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살해한다. 성매매를 직업으로 하는 여자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벌이고 말았다는 남자의 집착어린 순애보에 그렇게 안 돌아오는 사람이 비단 그녀만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어느 날 죽은 지 7년가량 된 백골 시신이 서울 마천동에서 발견된다. 자연사를 했든 동거남이 살해를 했든 그렇게 돌아오는 사람이 비단 그녀만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어느 날 한 택시기사가 숨진 채 발견된다. 태풍에 의한 갑작스런 폭우로 고장 난 차안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채 물에 잠겨야 했다지만 그렇게 황당한 죽음을 맞는 사람이 비단 그만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어느 날 한 농장 주인이 모자이크로 처리된 얼굴로 퉁명스럽게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반달곰의 쓸개에 주사를 꽂고 쓸개즙을 뽑아내는 게 합당한 일이라며 법도 모르면서 떠들어대고 있지만 그렇게 미친 고통을 겪는 동물이 비단 반달곰만의 일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팔순 넘은 외할아버지가 한 달 넘게 사경을 헤매고 계신다. 하루에 두 번 삼십분이 주어지는 중환자실 면회 중에 이제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겠습니다, 라고 의사가 말했다. 아들 딸 며느리 사위에 손자 손녀까지 도합 서른이 넘는 가족들이 속속 병원으로 모여들었다. 초등학생 사촌동생부터 환갑 넘은 아빠까지 그렇게 모이고 보니 소규모 대한민국이었다. 우리들이 기다리는 건 따지고 보면 외할아버지의 죽음 선고였다. 어차피 가망이 없으셨기 때문이었다. 예고된 죽음 앞에 우리들은 저녁에 대식구들이 몰려가 먹을 식당을 고르는 게 더 고민스러울 만큼 일상의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 나라에서 이렇게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큰 복이 아닌가.

날이 더워 하드나 사먹을까 하여 집 앞 편의점에 들렀다. 파라솔 아래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이 맥주를 병째 나발 불고 있었다. 늘어진 흰색 러닝에 물 빠진 반바지를 세트인양 맞춰 입고 형님 먼저 아우 먼저 오징어를 건네며 질겅질겅 씹던 그들이 어느 순간 쌍욕을 주고받으며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병이 깨지고 깨진 유리조각으로 죽이니 살리니 하는 큰 싸움판이 벌어졌다. 엉겁결에 장을 보게 된 나는 힐끔힐끔 그들을 피해 황급히 편의점을 빠져 나왔다.


그러나 구경은 뭐니 뭐니 해도 싸움 구경임을 아는 까닭에 나는 뭘 더 살 것이 있었다는 듯 다시금 편의점을 찾아갔다. 싸움은 이미 종료되었고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던 그들은 이 복중에 어깨동무까지 한 채로 맥주병째 건배를 하며 유쾌하게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뭐냐, 이 황당한 시추에이션은. 이 여름, 한국에서 산다는 일이 글쎄 참 이 모양이다.

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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