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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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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살해한다. 성매매를 직업으로 하는 여자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벌이고 말았다는 남자의 집착어린 순애보에 그렇게 안 돌아오는 사람이 비단 그녀만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어느 날 죽은 지 7년가량 된 백골 시신이 서울 마천동에서 발견된다. 자연사를 했든 동거남이 살해를 했든 그렇게 돌아오는 사람이 비단 그녀만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어느 날 한 택시기사가 숨진 채 발견된다. 태풍에 의한 갑작스런 폭우로 고장 난 차안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채 물에 잠겨야 했다지만 그렇게 황당한 죽음을 맞는 사람이 비단 그만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어느 날 한 농장 주인이 모자이크로 처리된 얼굴로 퉁명스럽게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반달곰의 쓸개에 주사를 꽂고 쓸개즙을 뽑아내는 게 합당한 일이라며 법도 모르면서 떠들어대고 있지만 그렇게 미친 고통을 겪는 동물이 비단 반달곰만의 일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팔순 넘은 외할아버지가 한 달 넘게 사경을 헤매고 계신다. 하루에 두 번 삼십분이 주어지는 중환자실 면회 중에 이제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겠습니다, 라고 의사가 말했다. 아들 딸 며느리 사위에 손자 손녀까지 도합 서른이 넘는 가족들이 속속 병원으로 모여들었다. 초등학생 사촌동생부터 환갑 넘은 아빠까지 그렇게 모이고 보니 소규모 대한민국이었다. 우리들이 기다리는 건 따지고 보면 외할아버지의 죽음 선고였다. 어차피 가망이 없으셨기 때문이었다. 예고된 죽음 앞에 우리들은 저녁에 대식구들이 몰려가 먹을 식당을 고르는 게 더 고민스러울 만큼 일상의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 나라에서 이렇게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큰 복이 아닌가.
날이 더워 하드나 사먹을까 하여 집 앞 편의점에 들렀다. 파라솔 아래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이 맥주를 병째 나발 불고 있었다. 늘어진 흰색 러닝에 물 빠진 반바지를 세트인양 맞춰 입고 형님 먼저 아우 먼저 오징어를 건네며 질겅질겅 씹던 그들이 어느 순간 쌍욕을 주고받으며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병이 깨지고 깨진 유리조각으로 죽이니 살리니 하는 큰 싸움판이 벌어졌다. 엉겁결에 장을 보게 된 나는 힐끔힐끔 그들을 피해 황급히 편의점을 빠져 나왔다.
그러나 구경은 뭐니 뭐니 해도 싸움 구경임을 아는 까닭에 나는 뭘 더 살 것이 있었다는 듯 다시금 편의점을 찾아갔다. 싸움은 이미 종료되었고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던 그들은 이 복중에 어깨동무까지 한 채로 맥주병째 건배를 하며 유쾌하게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뭐냐, 이 황당한 시추에이션은. 이 여름, 한국에서 산다는 일이 글쎄 참 이 모양이다.
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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