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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9.13 18:31 수정 : 2010.09.13 18:31

이승한 티브이 평론가

케이, 긴 여행 무탈한가. 이렇게 신문지면을 빌려 자네에게 편지를 함은 다름이 아니라 일전에 자네와 가졌던 토론을 마무리짓고 싶어서일세.

기억하는지. 자네는 티브이가 우리의 생각의 폭을 좁히고 우리로부터 대화를 앗아간다고 이야기했네. 자본과 권력의 입맛에 맞도록 제한된 정보만을 제공하면서 우리의 사유 폭을 그 테두리 안으로만 제한한다고 말이야. 내가 예능이 당대 대중의 욕망을 충실하게 반영하는 거울에 지나지 않는다 말했던 것에 대한 자네의 반론이었지.

나는 자네 의견을 증명하려면 티브이 이전의 대중들이 오늘의 우리보다 더 폭넓게 사유하고 대화했다는 증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반박했네. 또한 나는 티브이가 우리의 시야를 ‘나’와 ‘내 주변’으로만 이뤄진 소우주를 넘어, 동시대 지구촌 곳곳의 현실에까지 확장시켜 준다고도 했지. 아마 난 그때 문화방송의 국제 교양 프로그램 <김혜수의 더블유>를 염두에 두고 말했던 것 같아. 자네가 이 프로그램을 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김혜수의 더블유>는 하루 살기에 바쁜 나 같은 사람에겐 정말 귀중한 프로그램이었다네. 이 프로그램이 아니었다면 ‘뚱뚱할수록 아름답다’는 전통적 미인상에 맞추기 위해 강제로 사육당하는 모리타니 소녀들의 실태 같은 건 알지 못했을 걸세. 다이아몬드 때문에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천천히 몰락하고 있는 부시맨 부족의 이야기도 이 프로가 아니었다면 전혀 몰랐을 거야. 오직 나 스스로에 대한 생각으로만 수렴되기 쉬운 사유의 폭을 지구 반대편까지 넓혀주는 이 프로그램은 금요일 밤의 놓치기 어려운 즐거움이자 배움이었네.

워낙 떠들썩한 이야기니 자네도 대강은 알 거라 생각하네만, 최근 들어 난데없이 이 프로그램을 폐지한다는 이야기가 들리고 있네. 듣자 하니 경영진에서 채널 경쟁력을 제고하자며 내린 결정이라더군. 동시간대 공중파 시청률 1위를 기록한 프로그램을 폐지하는 게 경쟁력 제고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나로서는 도통 곱씹어 봐도 알 수가 없었네.

그러나 ‘큰집’에 불려가서 ‘조인트를 까이고’ 오셨다는 김재철 사장님 생각은 조금 다르신 듯하네. 아직 왈가왈부 말이 많아서 당장 폐지는 쉽지 않겠지만, <김혜수의 더블유>를 굳이 폐지해야 채널 경쟁력이 올라간다 말한 분이 사장이시니 마냥 안도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나. 고민해 보았는데, 아무래도 ‘큰집’에 계신 분께서는 티브이를 보는 시청자들이 방송을 보고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못마땅하신 듯하네. 그냥 티브이를 보고 마냥 즐거운 나머지 시청자들이 비판적 사고 따위는 안 했으면 싶으신 모양이야. 그게 아니라면 김재철 사장님이 왜 스타 진행자를 영입한 지도 얼마 안 되는 인기 있는 교양 프로그램을 폐지하는 자해를 무릅쓰겠는가? 설마하니 김 사장님께서 인지도 높고 시장의 반응도 좋은 자사 상품을 생산 중단해야 회사 경쟁력이 올라간다고 생각할 만큼 바보는 아니실 거라 생각하네.

케이, 어쩌면 자네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네. 정말로 티브이가 대중의 사유의 폭을 좁히려고 드는 걸 보니 자네 혜안이 이번에도 정답을 찾은 거 같아. 그런데 내 속은 또 왜 이렇게 쓰라린지 모르겠네. 보는 사람을 생각하게 만드는 프로그램이 어디 <김혜수의 더블유> 하나뿐이겠는가.

나는 이제 <무한도전> <피디수첩> <시사매거진 2580> 같은 프로그램의 이름들을 가만히 불러본다네. 우리에게 폭넓은 사유를 가능하게 만들어 줬다는 죄목으로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모르는 그 이름들을 말일세.


이승한 티브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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