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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12.15 21:20 수정 : 2011.04.01 17:19

김민정 시인

올해 1월 장편소설을 한 권 만들었다. 작가 이름은 김남일, 축구 잘하는 선수와 동명이인이라 축구하면서 언제 소설을 다 썼대? 라는 반응을 불러일으킬 만큼 일반 대중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동료 작가들에게는 소신과 의리로 알려진 집념 있는 필력의 소유자다. 그런 그의 책 제목은 <천재토끼 차상문>, 원제는 ‘슬픈 토끼’였으나 작가보다 몸무게가 조금 더 나가는 편집자인 내가 빡빡 우겨 짓고 보니 그랬다. 어쨌거나 토끼로 태어난 한 사람이 지구를 걸고 벌이는 이야기가 너무 재미나서 책을 만들 때 누구나 베스트셀러를 꿈꾸듯 사심으로 덤볐으나… 책은 어느 순간 판매보다 반품의 수가 곱절을 넘을 만큼 무참히 잊혀갔다. 인쇄소에서 빛으로 눈 뜬 책이 창고에서 어둠으로 눈 감는 ‘슬픈 책’의 운명. 그러나 우리가 뜨겁게 태어나 차갑게 죽어가듯 누군들 그렇게 시작했다 그렇게 끝나지 않으랴.

그러다 지난여름 작가의 투병 소식을 들었다. 냅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으로 뛰었다. 위암 수술을 마치고 회복중이었는데 그는 환자가 아니라 보호자가 아니라 마치 집도한 의사처럼 전문적인 해설을 곁들여가며 조리 있게 자신의 병을 말하는 거였다. 하여튼 누가 소설가 아니랄까봐 아는 것도 참 많으세요, 나는 혀를 찼다. 무엇보다 한 손에는 여전히, 책이었다. 머리맡에도 몇 권의 책이 몇 번 들춰진 모양새로 쌓인 채였다. 하여튼 누가 소설가 아니랄까봐 이 와중에도 참 유난이세요, 나는 눈을 흘겼다. 여러 동료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퇴원까지 마친 그가 길고 긴 항암치료에 들어갔다. 그사이 나는 또 다른 책들과 만나느라 그를 잊고 지낸 것도 사실이다. 어느날 아침 예상치 못한 수량의 책 주문이 들어왔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주문은 계속됐다. 책이 팔린다는 기쁨보다 의아스러움이 더 컸다. 대관절 이게 무슨 일이람. 알고 보니 인기리에 방송중인 드라마에서 얼굴이 조막만하고 선한 눈매를 가진, 우월한 유전자의 한 남자배우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이 책을 펼쳐 읽었다고 했다. 그 시간이 아주 찰나이긴 하였으나 알아본 사람들이 만든 갈무리 화면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탓에 입소문도 퍼졌다고 했다.

책 관련 특강을 다니다 보면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이거다. 무슨 책을 읽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꼭 읽어봐야 하는 책을 추천해주실 수 있나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책 매장에 하루 평균 입고되는 책이 300여종쯤 된다고 한다.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매년 10만권이 넘는 신간이 쏟아지는 셈이다. 어마어마하면서 무시무시한 양이다. 그럼에도 직장인들 한달 평균 도서비가 3만원이 채 안 된다고 하니, 내 카드 명세서 속 소주와 맥주와 곱창과 노가리의 가격을 떠올리며 잠시나마 책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흘러간 예능 프로그램 중에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라는 코너가 있었다. 전국을 다니며 책을 소개하고 독서를 권장하며 나아가 도서관을 지어주는 기획이었는데, 출판계 안팎으로 이런저런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고는 하나 지금 와 생각해보면 그런 취지라도 ‘있었던’ 게 어딘가 싶다. 그래도 그땐 사람들이 ‘그 책들’이라도 사서 보지 않았던가. 공익이라는 이름으로 유지되는 텔레비전 채널에서 책을 말하거나 책을 보이기는 한다지만 시청률을 핑계 삼는 건, 그로 폐지 운운의 책임을 우리에게 전가하는 건 억지가 아닐까 싶다.

흔히 텔레비전에 나온 누구누구가 든 가방 봤어? 누구누구가 입은 옷도 유행이라며? 라고들 한다. 나는 꿈꿔본다. 텔레비전에 나온 누구누구가 든 소설책 봤어? 누구누구가 든 시집도 유행이라며? 의 시절을. 아, 알겠다, 아이 참, 꿈도 내 맘대로 못 꾸냐고요!

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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