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1.05 21:27
수정 : 2011.04.01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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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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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다. 또 한 살을 먹었다. 보신각 종소리를 들으며 해피 뉴 이어, 사람들에게 신년 문자를 보내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또다시 그 풍경과 맞닥뜨리고 있었다. 점점 한 해가 한 달 같고 한 해가 하루 같고 한 해가 한순간 같아진다. 큰일이다. 이거 늙는다는 증거 아닌가. 센티멘털해져서는 방으로 들어와 새로 산 다이어리를 펼쳤다. 스물이 되면 서른이 되면 정말이지 아주 완벽한 인격의 소유자인 완전한 어른이 될 줄로만 알았는데 마흔을 향해 맹렬히 달려가고 있는 요즘의 나는 사전적인 의미로 아직 어린이인 것만 같다. 다 자라지 못한, 그래서 제 한 몸을 책임지지 못하는 어린이.
작년 연말 무렵 발가락이 부러졌다. 뜻하지 않게 무릎께까지 깁스를 하게 되었다. 매일같이 계속되는 약속에 모임에 하도 힘이 들어 아 누가 날 때려서 억지로라도 병원에 입원하고 싶다, 입방정을 떨어대다 그만 쌤통이었던 거다. 고작해야 문지방을 걷어찬 것뿐인데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휠체어에 옮겨졌다. 아 저 무거운데. 그래봤자 60킬로그램 넘으시겠습니까. 휠체어를 밀어주시는 병원 관계자 분이 슬쩍 내 발을 보며 말했다. 이참에 장애우 체험 하신다 생각하세요. 평생에 그런 경험 한번 해보는 것도 큰 공부가 아니겠습니까.
자고 나니 내 세 번째 발인 목발이 떡 버티고 서 있었다. 반짝반짝 은빛으로 전형적인 새것의 얼굴이었다. 이걸 어떻게 짚나. 그 한 발을 겨드랑이에 끼고 거울 앞에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몇 걸음을 디뎌봤다. 불편함을 넘어선 어색함이 내 얼굴에 가득했다. 하필 폭설이었다. 게다가 혹한이었다. 거리 위에서 나는 목발을 수하로 삼은 것이 아니라 상전처럼 모셔야 했다. 장마철 빗물이 가득 고인 고무장화를 신은 채 침대 위에 누운 이 느낌, 불면증의 나날이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라고 푸념을 늘어놓던 나는 어느 순간 사는 게 사는 거지 뭐, 라는 식의 긍정적 마인드를 찾아갔다. 목발 짚고 달리기 대회에 나가면 나 일등할 거야, 라고 떠들 정도로 목발에 적응이 되었던 거다. 그제야 목발이 살아가는 세상살이에 대해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눈과 귀가 만들어지는 듯했다.
정류장에 버스가 선다. 버스에 오르기 위한 턱이 허들처럼 높다. 나는 최대한 한쪽 다리에 힘을 준 채 점프하듯 올라선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그저 구경할 뿐이다. 아마 저렇게 힐끗거리는 사람들 중에 나도 있었을 것이다.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란 것을 그래서 더 잘 안다. 누군가에게 손을 내미는 일에도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계단을 걸어 내려간다. 나는 당연히 느릴 수밖에 없고 더딜 수밖에 없는데 사람들은 너무나도 바쁘다. 내 뒤에서 나와 속도를 맞춰줄 여유가 없기 때문에 신경질을 내며 다른 사람들 틈을 파고든다. 아마 저렇게 씩씩거리며 제 걸음에 집중하는 사람들 중에 나도 있었을 것이다.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란 것을 그래서 더 잘 안다. 누군가에게 시간을 할애하는 일에도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신년을 맞아 여기저기서 올해의 사자성어를 뽑고 발표하는 걸 보았다. 여세추이, 민귀군경, 지성진력… 한자를 잘 모르는 나는 그들이 해석하는 대로 내용을 풀어 읽다가 나한테 맞는 뭔가가 없을까 꼼꼼 뒤적거렸다. 에이 모르겠다. 역시 나에게는 쓰기도 쉽고 알아먹기도 쉬운 역지사지가 단연 최고였다. 간만에 다이어리 맨 앞장에 역지사지, 라고 한자로 멋들어지게 써보았다. 네가 총을 쏘았으니 나도 총을 쏠 게 아니라 네가 총을 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는 배포, 음, 욕심일까. 어쨌거나 한번들 깁스해보시라, 안 해보고는 말을 하지 마시라. 새해 덕담치고는 좀 거시기하다는 거 인정!
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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