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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08.22 19:03 수정 : 2011.08.22 19:03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사람들이 까맣게 잊고 있던 질문을 시작했다
‘사람이라는 게 뭘까?’ ‘사람은 무엇으로 사나?’

지리멸렬. 오늘 한국에서의 삶을 이보다 더 또렷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수십년 동안의 싸움으로 이룬 민주화가 막무가내식 시장주의의 침입으로 이어지면서 시작된 일일 게다. 슬프게도 민주화운동의 전설적 투사이던 대통령과 가난한 사람들의 변호사이던 대통령이 정리해고법과 파견법, 기간제법을 만들며 그 선봉에 섰다. 비정규 노동자가 정규직 노동자보다 더 많아지고 정규직 노동자도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신세가 되었다. 교육은 한낱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만들어내는 공정으로 변했고 아이들은 더 이상 어른들에게서 인간의 삶에 대해 배울 수 없게 되었다. 돈과 경쟁에 대한 강박과 불안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간직해온 삶의 소박한 원칙들마저 무너뜨렸다. 인생에 관한 한가지 이야기만 남았다. ‘현실이 어쩔 수 없지.’

그런 지리멸렬한 삶에 불현듯 질문을 던진 건 버스다. 지난겨울부터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부산 영도의 조선소 크레인에 올라 농성을 벌이고 있는 한 노동자에게 가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버스. 자신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극한 현실에 있지만 오히려 더 당당하고 유쾌하게 인간적 위엄을 갖고 살아가는 그를 보면서 사람들은 ‘현실이 어쩔 수 없지’만을 되뇌던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소비와 소유로만 존재를 증명하는 사회에서 그것을 못해서 혹은 못하게 될까 봐 번민하던 사람들이 까맣게 잊고 있던 질문을 시작했다. ‘사람이라는 게 뭘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들은 1박2일의 버스여행에서 돈이 아니라 사람, 경쟁이 아니라 연대의 기쁨으로 치유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은 자신이 노동자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25년 전 극우독재가 물러났을 때 했어야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나 민주화와 함께 밀어닥친 시장주의의 파도는 ‘국민’들로 하여금 노동자임을 발견하게 하는 게 아니라 단지 ‘국민’을 ‘시민’으로 바꿔 부르게 만들었다. 사회운동의 주류가 ‘민중’운동에서 ‘시민’운동으로 바뀌고 극우언론 문제나 소액주주운동 같은 개혁적 의제가 부상하면서 노동 문제나 계급적인 의제들은 ‘구식 운동’으로 밀려났다. 시민이라 불리는 노동자들은 노동 문제를 남의 일로 생각하게 되었다. 다른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내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연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기보다는 일상의 불편을 툴툴거리거나 자본의 선동에 귀 기울였다. ‘꼴사나운 노동자 놈들!’ ‘저게 다 밥그릇 싸움이지!’

그러던 사람들이 고공농성의, 노동운동 가운데서도 가장 극한적인 싸움으로 여겨지는 싸움의 주인공과 친구가 되었다는 건 정말이지 희한한 일이었다. 버스가 그 희한한 일을 만들어냈다. 버스에서 사람들은 말했다. ‘김진숙의 문제가 내 문제고 내 아이의 문제이기도 한걸요.’ 시민이라 불리는 노동자들이 비로소 제 현실과 현실의 변화를 위한 운동과 조우하고 그 운동의 주인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조용히 치러진 새로운 역사의 서막이었다.

8월27일, 네 번째 희망버스의 행선지는 서울이다. 이번엔 어른들은 물론 아이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우리 아이들 대부분은 노동자로 살아갈 게 아닌가. 그런데 아이들은 노동자는 부끄러운 삶이라는, 행복은 돈으로 사는 것이라는 거짓말을 배우며 시들어간다. 노동자로 살아갈 아이들에게 노동자는 부끄러운 삶이라고, 행복은 돈으로 사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건 일찌감치 아이들에게서 인간적 긍지와 자존감을 거세하여 온순한 머슴으로 만들려는 자본의 전략이다. 보고만 있을 순 없지 않은가? 우선, 이번 희망버스를 우리 아이들의 살아 숨쉬는 노동학교이자 치유의 놀이터로 만들어보자. 꼭 그렇게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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