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11.30 19:11
수정 : 2011.11.30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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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혁 붕가붕가레코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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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국산 프로그램
의무편성 완화를
약값 상승과 엮어서
생각하게 된 걸까?
지식경제부를 비롯한 정부 부처들이 편찬한 ‘한-미 에프티에이로 달라지는 우리 생활’이라는 자료의 ‘문화생활’ 대목을 읽어봤다. “이제 미드가 미국과 동시 방영된다고?”라는 제목으로 미국 방송사가 한국에서 방송 사업을 하는 게 가능해지는 한편 국산 프로그램 의무편성 제한이 완화되니 더 다양한 미국 드라마를 좀더 빠르게 방송을 통해 접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미 다들 웹하드를 비롯한 ‘어둠의 경로’를 통해 몇십원만 치르면 최신 미국 드라마를 볼 수 있는 상황에서 이런 걸 윤택해진 소비생활이라며 내세우는 걸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더군다나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핵심 중 하나가 지적재산권의 관리를 강화하는 것임을 생각해보면 소비자 입장에서는 오히려 자유무역협정은 안 좋은 것이 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 드라마에 대한 저작권 침해 단속이 강화되면 푼돈 내고 동영상 파일을 구할 수 있는 경로들이 사라지게 될 것이고 결국 몇십원 주고 구했던 드라마를 몇천원 주고 내려받아야 되기 때문이다. 위의 자료에는 이런 얘기가 없다. 왜?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구김살 하나 없는 것이어야 하니까.
문화 산업에 종사하는 입장에선, 비록 미국 드라마에 한정된 변화라 하더라도 저작권 침해 단속이 강화되면 불법 다운로드에 관해 전반적인 변화를 초래할 것이란 막연한 기대를 갖게 된다. 하지만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좋은 것이라고 하기엔 국산 프로그램 의무편성 제한의 완화로 인해 국내 방송 제작자들이 겪을 고초를 간과할 수 없다. 그런데 ‘소비자’들이 볼 지식경제부의 자료에는 의무편성 제한 완화만이, ‘창작자’들이 볼 문화체육관광부의 자료에는 지적재산권 관리 강화만이 나와 있다. 왜? 앞서와 마찬가지 이유.
하지만 이런 식으로 사실을 취사선택하는 것이 비단 정부의 문제만은 아니다. 얼마 전 <경향신문>은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부수법안인 저작권법의 날치기 처리로 1980년대 말~90년대 초에 발매됐던 음반에 대한 저작인접권이 부활했다며 음원을 저렴하게 들을 수 있는 소비자들의 선택권이 제한된다고 지적하는, ‘한-미 에프티에이 후폭풍’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그런데 좀더 전인 10월 말, 이 신문은 밴드 ‘봄여름가을겨울’ 등의 사례를 들며 음반들이 창작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재출시되고 있어 똑같은 법이 빨리 통과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날치기 처리 이전엔 창작자의 권리를 수호하던 긍정적인 법이 아무런 내용 변화도 없이 한 달 사이에 소비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부정적인 법이 되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반대할 근거를 하나 더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처럼 한쪽에서 이렇게 말하는 걸 저쪽에선 저렇게 말하는 상황인지라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천국’이라는 얘기만큼이나 ‘한-미 자유무역협정=지옥’이라는 식의 얘기도 현실감 없긴 마찬가지. 그런데 에프티에이를 하나의 입장에서만 볼 수도 없다. 지적재산권의 강화는 저작권료 수입을 늘리지만 동시에 복제의약품 생산 금지로 약값을 오르게 하여 결과적으로는 더 많은 돈을 쓰게 만들 수도 있다. 가뜩이나 복잡한 이해관계의 대차대조표를 사실 편집의 여부까지 고려해가며 계산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애초에 이렇게 얽히고설킨 문제를 한꺼번에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왜 저작권 문제를 국내 방송 의무편성 제한 완화 및 약값 상승 문제와 엮어서 생각하게 된 것일까? 나에겐 이게 현재의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원점으로 되돌려야 할 이유다. 제대로 판단할 능력도 없는 상황에서 한꺼번에 많은 변화를 초래할 결정을 심지어 날치기로 해버린 것. 고건혁 붕가붕가레코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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