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2.27 19:22
수정 : 2012.02.27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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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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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는 시청자들이
드라마의 재미에 빠져
방송 공정성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고 보나
아무리 문학의 효용이 쾌락에 있다 하더라도, 식민지 말기 도탄에 빠진 백성들 면전에서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을 노래한 시인은 도무지 염치가 없다. 전쟁공출로 곡기조차 잇기 어려웠던 시절, 과연 술 담글 곡식이 어디 있었으며, 저녁놀을 감상할 여유는 또 어디 있었을까. 시인이 술에 절어 한가히 저녁놀의 풍류나 읊을 때 식민지 조국의 꽃다운 딸들은 군대위안부로 끌려가고, 독립운동가는 고문 끝에 참수당했으며, 끼니를 거른 아이들의 얼굴은 누렇게 떴다. 시인은 이렇게 신산했던 당시 삶의 자리를 정말 몰랐을까, 알면서도 외면했을까.
지난 2월23일 <문화방송>(MBC)은 “문화방송 시청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라는 제목의 광고를 여러 중앙일간지에 게재하였다. 광고에서 그 방송사 사장과 회사 쪽은, 노조의 불법파업으로 일부 방송 차질이 빚어졌지만, 대다수 프로그램은 ‘정상적’으로 방송되고 있다면서, 특히 <해를 품은 달>이나 <빛과 그림자> 등의 드라마 시청률이 최상위를 기록하고 있는 점에 시청자들께 깊이 감사드린다고 했다. 이 시국에 사과라면 모를까 감사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아귀가 맞아 보이지 않았다. 결국 광고문을 세 번쯤 다시 읽고 난 뒤에야 깨달았다. 아, 이 사람들은 시청자들이 그저 연예오락 프로그램이나 드라마의 재미에 흠뻑 빠져 방송의 공정성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고마워하는구나. 매우 불쾌했다. 모욕감을 느꼈다.
물론 오늘의 방송 파행도, 따지고 보면 노조의 파업 때문이 아니라 공영방송의 공정방송 포기가 초래한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정상화의 지름길은 무엇보다도 파행의 근본 원인, 곧 방송을 정권의 품에서 놀아나게 한 장본인을 드러내는 것으로부터 찾을 수 있겠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이 감사해 마지않는 ‘시청자들의 관심과 성원’은 ‘지금까지의 엠비시’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노조가 파업중 제작한 ‘엠비시 제대로 뉴스데스크’로 모아지고 있다. 조회수가 무려 60만에 이를 정도니, 그야말로 국민들의 폭발적인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셈이 아닌가. 엠비시 노조는 대국민사과문과 ‘엠비시 제대로 뉴스데스크’를 통해 ‘지금까지 문화방송’이 어땠는지를 이렇게 고백한다. “그동안 국민들이 원하고 궁금해하는 뉴스를, 안 해도 되는 뉴스가 아닌 꼭 해야 할 뉴스를, 심지어 세상 모두가 아는 사실에도 뉴스데스크는 외면했다. 공영방송 엠비시는 엠비방송 엠비시가 되었고, 국민의 방송 엠비시는 정권의 방송 엠비시가 되었다. 주인인 국민을 섬기지 못하고 저들의 품 안에서 놀아났다.” 언젠가 내가 아는 한 엠비시 기자는 “다른 건 몰라도 취재 현장에서 시민들로부터 손가락질당하고, 비아냥 듣는 게 가장 괴로웠다”고 말하다 끝내 눈물을 비쳤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토록 가슴 깊은 통증을 느끼게 하였을까.
“‘김재철 사장 때문’이라는 이유로 비겁했고, ‘엠비정권의 언론탄압 때문’이라는 이유로 비굴했다”는 토로는 아마도 언론인으로서 최소한의 직업윤리, 자존감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염치가 이제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는 마지막 절규로 들린다. 아무리 방송이 시청률에 목숨을 건다 해도, 정작 공영방송의 기본 사명인 공정보도는 외면한 채 몇몇 드라마의 시청률 운운하며 방송의 파행을 가리고 정상 방송 운운하는 것은 도무지 염치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김재철 사장은 그 일선 기자의 심정을, 아니 시청자들의 공정방송에 대한 열망을 정말 모르는 걸까, 아니면 애써 외면하고 있는 걸까. 그이의 염치는 회사는커녕, 집에도 못 들어간 채 특급호텔을 전전하며 이 겨울의 끝자락 속에 어디서 헤매고 있는 것일까.
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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