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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6.20 19:28 수정 : 2012.06.20 19:28

고건혁 붕가붕가레코드 대표

아마 과학이 낳은 최악의 산물 중 하나는 인종차별주의와 나치즘의 사상적 기반이 된 사회진화론일 것이다. 사회진화론은 생물의 종과 사회공동체라는 엄연히 다른 존재를 유비한, 말도 안 되는 비약이었다. 과학이 스스로를 과신하는 순간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 해석 과정에서 주관적인 가치 판단이 개입될 가능성, 그리고 그러한 가치가 누군가의 이익이 될 가능성이 존재하는데(다윈의 자연선택설은 맬서스의 ‘주장’에서 영감을 얻었고 맬서스의 주장은 빈곤을 자연법칙으로 취급함으로써 빈부 격차를 합리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것을 무시하는 순간 과학은 사회진화론과 같은 오만하고 기형적인 확신을 낳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과학의 객관성은 어마어마한 부와 폭력을 기반으로 전세계에 군림하던 유럽의 인간들이 스스로의 우월성에 대한 확신을 강화하고 자신들의 지배체제를 치장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오만한 과학의 반대편 극단에 어떤 판단에도 가치가 개입할 수밖에 없기에 모든 사상은 그저 신념일 따름이며 확정된 진리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견해가 있다. 이러한 견해는 실제로 과학으로 치장한 단선적인 유럽 중심 세계관의 허구성을 까발리고 더 다원적인 가치를 구축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지만, 때때로 극단적인 상대주의로 인해 기형적인 판본들을 낳는다. 이번에 ‘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회’(교진추)가 몇몇 과학 교과서에서 시조새와 말의 진화 과정에 대한 내용을 삭제시킨 것이 바로 그런 사례다.

그들이 겨냥하는 것이 단지 교과서에 서술된 잘못된 사실 몇 개를 수정하는 것이 아님은 본인들도 인정하고 있는 바다. (“진화론은 증명된 과학적 학설이 아닌 하나의 신념 체계일 뿐.”) 그리고 그 중간 단계로 진화론을 자신들의 ‘신념 체계’인 창조론과 똑같은 위상을 가지게 하는 것은 상대주의적 발상이다. (“신다윈주의와 단속평행설을 같은 비중으로 소개하여 해석체계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타당.”) 문제는 그들의 목적이 궁극적으로는 창조론이 입각한 기독교적 세계관에 생명 발생에 대한 지배적인 이론의 위치를 부여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진화론은 유물론적 자연주의에 기반을 둔 무신론적 주장이므로 (중략) 여러 가지 사회 병리 현상의 조장 요인.”)

사실 과학의 미덕은 끊임없는 회의에서 나온다. 자신의 믿음을 외부의 사실을 통해 검증하고 다시 다른 과학자들에 의해 검증을 받는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도출된 결론에 대한 반증 가능성 역시 언제든지 존재한다. 과학은 전문적으로 의심의 방법을 훈련받은 많은 과학자들이 회의와 검증을 누적시켜 온 체계이며 그러한 검증이 그릇된 것일 경우 언제든지 자기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 있는 과단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 시조새와 말의 진화 과정 삭제의 근거가 된 최근의 학설들이야말로 진화론이 과학임을 입증해주는 사례다. 이미 진화론 자체가 학계 내부에서 끊임없는 회의의 대상이 되고 있고 만약 그것을 반증할 수 있는 결정적인 근거가 발견된다면 아예 깡그리 부정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과학의 외피를 뒤집어쓴 창조론, 이른바 ‘창조과학’이 이런 식으로 자기 존재 자체에 대해 회의를 하고 있다면, 그것을 진화론과 같은 위상으로 인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접한 창조과학은 오로지 창조의 근거만을 찾아내고 진화론을 비판하는 데 매진할 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기본 전제에 대해 전혀 회의를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결여된 것은 자신에 대한 회의다. 만약 정말로 사람들이 창조론을 수용하기를 원한다면, 아니면 최소한 진화론과 동일한 위상에서 고려해주기를 바란다면, 일단 스스로부터 의심하기를.

고건혁 붕가붕가레코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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