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7.30 19:29
수정 : 2012.07.31 12:03
|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
모처럼 정치가 제 기능을 하는구나 싶었다. 얼마 전 문화방송 노조가 파업을 중단할 때였다. 노조 쪽은 여야 간에 김재철 문화방송 사장을 퇴진시키기로 합의했고 그에 따라 파업을 중단한다고 했다. 그 며칠 전부터, 김 사장 퇴진에 관한 협의가 오가고 있다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당연히 그렇게 여겼다. 국회가 협상을 통해 공영방송의 장기 파업 사태를 해결했구나! ‘김 사장의 퇴진에 합의한 일이 없다’는 여당 관계자의 코멘트가 몇몇 언론에 실렸지만 무게감이 없어 보였다. 인사권이 청와대에 있는데, 아무리 합의가 있었다 한들 여당에서 시인할 수가 없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새삼 반가웠다. 파업이 중단됐거나 김 사장이 물러난다고 해서가 아니다. 그래도 정치가 막힌 곳을 뚫어주는 역할을 하는구나…. 당연한 건데, 그런 일 하라고 정치가 있는 건데, 왜 놀라지? 돌이켜보니, 이 정부가 그랬다. 반대하는 목소리가 아무리 커도 ‘너는 짖어라, 나는 상관 안 한다’는 모습이었다. 군사정권 때도 반대가 심하면 장관이라도 갈아치우며 듣는 척했는데 이 정부는 시늉도 안 했다. 그 단호한 모습에 정치권이 개입할 틈이 없을 것 같았는데 그런 일이 생기니 반가울 수밖에.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쁜 편이 정체를 드러내는 건 어떤 일이 처음 벌어질 때가 아니다. 국면이 바뀔 때이다. 처음의 비극은 조그만 잘못이나 실수로 일어나지만, 나쁜 편은 그걸 인정하기 싫어서, 최소한의 책임을 지기 싫어서 뻔뻔하거나 비열해진다. 더 나쁜 일을 하거나,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안 한다. 관객의 노여운 감정이 작동하는 것도 그때부터다.
노조가 현업에 복귀한 뒤부터 벌어지는 일이 딱 그 짝이다. 대대적인 보복인사가 있었다. 피디, 아나운서, 기자들을 드라마 세트장 관리에, 신축 건물 현장 관리에 발령을 냈다. 없던 부서까지 만들어 몰아넣었다. 막상 올림픽 중계방송엔 일 경험이 부족한 이들을 동원해, 방송 실수와 물의를 비난하는 기사가 잇따른다. 아무래도 조만간 퇴진할 사장이 내릴 인사가 아니다. 아닌 게 아니라, 엊그제 발표된 방송문화진흥회 이사 구성을 두고, 김 사장의 퇴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기사들이 나온다.
여야 합의는 어떻게 된 건지, 여당은 ‘김 사장 퇴진에 합의한 일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실제로 여야의 합의 문안엔 그런 내용이 없다. “여야가… 노사관계에 대한 신속한 정상화를 위해 노사 양측 요구를 합리적 경영 판단 및 법 상식과 순리에 따라 조정, 처리하도록 협조하며….” 다분히 정치적 수사처럼 들린다. 하지만 말에는 문맥, 콘텍스트라는 게 있다. 거대 공영방송의 파업이 수개월 계속되는 와중에 이런 합의문을 냈다면, 그 뒤 노조가 파업을 멈췄다면, 멈춘 이유로 ‘여야간 김 사장 퇴진 합의’를 내걸었다면, 대다수 언론이 그 이유를 인용해 보도했다면, 그래서 나처럼 ‘오랜만에 정치가 제 기능을 했구나’ 하고 생각하는 국민들이 많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정말 김 사장 퇴진에 합의가 없었고, 또 퇴진시킬 의사가 없었다면, 언론이 물었을 때 ‘합의가 없었다’라고 답하는 소극적 태도로는 부족했다. 이런 중차대한 사안에서 오해를 살 여지가 있다면 별도의 성명을 내서라도 먼저 적극적으로 해명하는 게 공당의 자세가 아닐까. 우린 그런 합의 안 했으니 노조가 뭐라 하든, 국민이 어떻게 생각하든 우리 책임 아니다, 이게 공당의 자세일까. 사장 퇴진에 합의했는지 여부는 접어두고, 발표된 합의문만 놓고 보자. 지금 여당이 “노사관계에 대한 신속한 정상화를 위해… 협조”하는 건가. 국면이 바뀔 때 정체를 드러내는 나쁜 편이 되려는 건 아닌가.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