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0.29 19:18
수정 : 2012.10.30 10:50
|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
여성가족부가 싸이의 <라이트 나우> 등 292개의 노래를 청소년 유해매체로 지정했다가 해제한 것을 두고 곤욕을 치르는 듯하다. 유해매체로 지정한 게 무리였다면 지금이라도 해제한 게 반가운 일이지만, 몇 년 사이에 결정을 손바닥 뒤집듯 한 건 비난받을 수밖에 없다. 주무기관인 청소년보호위원회가 복지부에 있다가 여성가족부로 넘어오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며 여성가족부는 볼멘소리를 하지만, 사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답답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일이 여기까지 오게 된 배경에는 관계 법령의 모호한 조문, 문맥을 무시한 결정, ‘아니면 말고’ 식의 태도, 이 세 가지가 맞물려 있는 것 같다.
음반에 대해 청소년 유해매체 지정이 시작된 건 2006년 ‘음반 비디오물 및 게임물에 관한 법’이 폐기되고, 음반 심의가 청소년보호위원회로 넘어오면서부터다. 위원회의 유해매체 지정 결과에 대해 조금씩 논란이 일기 시작하더니, 지난해 초부터 법원이 잇따라 유해매체 지정 취소 판결을 하면서 정점에 올랐다. 법원은 “술에 취해 잠들면 꿈을 꾸죠”(<내일은>), “취했나봐 그만 마셔야 할 것 같아”(<비가 오는 날엔>)처럼 가사에 ‘술’이 들어갔다고 유해매체 판정을 한 것은 부당하다고 판시했다.
그럼 애당초 이런 가사를 유해매체로 규정한 근거조항이 뭘까. “성폭력을 포함한 각종 형태의 폭력행위와 약물의 남용을 자극하거나 미화하는 것”이라는 청소년보호법 제9조 3항과 같은 법 시행령의 “청소년 유해약물 등의 효능 및 제조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기술하여 그 복용제조 및 사용을 조장하거나 이를 매개하는 것”이라는 조항이다. 표현물에 대한 규제 조항의 표현이 딱 떨어지게 명쾌하기도 쉽지 않겠지만, 법이나 시행령 조항 둘 다 모호한 표현이 적지 않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법 운용일 터.
앞의 두 곡의 사례는 단지 ‘술’이라는 단어만 봤을 뿐, 문맥, 즉 콘텍스트를 무시한 처사임을 법원이 입증했다. 그러자 정부(여성가족부)는 지난해 10월, 음반시행세칙을 만들어 자의적 해석을 줄이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 세칙에서 술과 관련해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것을 직접적·구체적으로 권하거나 조장한 것”이라는 표현을 넣었다. 그런데 이 표현은 법 조항이나 시행령 조항보다 더 폭넓은 것 아닌가.
여하튼 이런 발표와 함께 정부는 법원의 판결에 항소하지 않았다. 법원 판결을 존중하겠다는 의미일 거다. 그렇다면 ‘술’자만 들어갔다고 유해매체로 지정한 다른 곡에 대해서도 빨리 지정을 취소해야 한다. 그럼에도 음반업자들에게 이듬해부터 재심 신청을 하라고 해놓고 있다가, “술에 취해서 I cried”(<제발>) 같은 가사로 유해매체 지정을 한 곡에 대해 올해 초 법원에서 또 취소 판결을 받았다.
정부는 이번에도 항소하지 않았다. 아울러 애초에 유해매체 결정을 내린 당사자들에 대해 책임을 묻는 일도 하지 않았다. 법원에서 서너 차례 연거푸 ‘잘못했다’는 소리를 듣고, 결정을 취소하게 생겼는데 항변도 하지 않고 책임도 지지 않았다. 그리고 최근에야 292곡의 유해매체 지정을 취소했다. 소송비용부터 결정 및 취소에 이르는 행정비용, 음반을 만든 이들의 고생 등은 누가 보상할까.
이런 게 ‘아니면 말고’ 식의 태도로 보일 수밖에 없는 건, 향후 방지대책이 모호해 보이기 때문이다. 관계 법령은 여전히 모호하다. 그러면 법 운용을 잘해야 할 텐데, 자의적이고 문맥을 무시한 결과가 또 나오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왜? 이미 그런 일이 생겼을 때 아무도 책임지지 않은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을 보호한다는 법의 운용부터가 청소년 교육에 좋지 못한 결과를 계속 내놓고 있는 셈이다.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