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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1.09 19:14 수정 : 2013.01.09 19:14

민규동 영화감독

버스가 도착한다. 오랫동안 길게 줄을 서 있었기에 꼭 타야 한다. 뒷부분은 듬성한데, 더 태울 수 없다며 버스는 문을 닫는다. 안쪽으로 더 들어가라고 고함친다. 게으른 욕심쟁이들이 밉다. 다음 버스에 올라타 자리를 잡는다. 더 들어가라고 손짓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조금만 기다리면 될 텐데 조급하게 안달이다. 여기도 얼마나 복잡한데.

차 밖에 서 있다가 차 안에 들어서면 바뀌는 마음처럼, 우린 권력을 얻은 전후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돌변해 있기 일쑤다. 여기에 그 숱한 혁명과 ‘레 미제라블’의 감동을 가진 프랑스조차 보수와 진보가 늘 박빙인 아이러니가 숨겨져 있다.

지난 기말 수업 때, 게임 화면과 캐릭터만으로 단편영화를 선보인 학생이 있었다. 나 말고 모두들 얼마나 재밌어하는지, 온라인 게임을 한 번도 안 해본 난 아찔한 나락감을 느꼈다. 순간 갈등했다. ‘오락실=탈선’이라고 호통치던 꼰대가 되어, 책에 빠지면 아이들 뇌가 이상해지고, 여성들은 생리적 문제가 생길 거라고 경고했던 17세기 학자처럼 게임폐해론으로 방어막을 칠 것인가.

떠올려보면 내 의사와 무관하게 늙어버린 순간마다 애써 부정했던 기억이 많다. 대학 시절 민중가요와 대중가요를 아우르는 진보적인 방랑시인이라 우기며 살았는데, 통기타로는 연주할 수 없는 서태지의 건방진 음악이 등장한 뒤, 무력감에 시달리다 기타와 포크송대백과를 끊어버렸다.

영화에 허를 찔린 한 출판사 사장의 비아냥도 기억난다. “20년간 영화를 본 적 없다. 허리가 아팠던 낡은 의자의 불쾌감 이후로.” 책 찢어 밑 닦다가 생채기 난 이후로 20년간 책을 안 봤다는 주장처럼 허무맹랑했지만, 이해된다. 박남정을 안 좋아했어도 빅뱅 팬들에 밀려 그 세대로 인정되는 아빠의 박탈감은 가출해서라도 콘서트에 가겠다고 맞서는 딸에게 증오로 전이된다. 새 세상에 자리를 내주는 건 서글픈 일이다. 하지만 그 자리도 남에게 빼앗은 자리가 아닌가. 보수화는 이렇듯 자기 것을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와 두려움, 그것에 무너지지 않기 위해 자신의 경험치를 신격화하는 방어기제다.

얼마 전, 박정희 탄신제에 눈물 흘리는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그들을 향해 혀를 차며 노무현의 기일을 되새김질하는 아저씨 아줌마들이 묘하게 겹치는 각성이 있었다. 양쪽 모두 역대 인기투표에 30%씩 차지하는 투톱 스타이며, 공히 비정상적인 죽음의 주인공들이다. 박을 언급한 영화는 명예훼손 소송을 당하고, 노의 결백을 따지면 천인공로할 패륜이라 욕먹는다. 둘을 절대 비교할 순 없지만, 그들은 이미 터부의 세계로 신격화된 전설의 버스에 올라타 버렸다. 신앙심에 파묻힌 양 팬클럽 회원들은 눈앞에 그 영웅들의 치부와 폐해를 아무리 들이대도, 자신이 감동받은 이미지만을 신전에 모셔놓고 그 맹목적인 신화를 고착화시킬 뿐, 냉정한 진실과 화해할 용기가 없다.

하지만 버스에 더 올라타느냐 마느냐의 이런 실랑이는 예컨대 걸어가는 사람들에겐 못내 씁쓸한 풍경이다. ‘전쟁을 겪어봤느냐’는 보수와 ‘유신을 겪어봤느냐’는 보수가 서로 자신의 고통이 기득권이라고 우겨대는 관습적인 쟁의일 뿐이다.

인간의 몸처럼 생긴 동굴인데, 톱니의 홈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미끄러져 들어가 몸이 틀어지면서 점점 괴물의 형상으로 바뀌는 전설의 형벌처럼, 버스에 냉큼 올라탄 자는 점점 노쇠해질 뿐 다시 내리기 어렵다. 세대 간의 소통이 어려운 건 그 무서운 불가역성 때문이다.

나이가 형벌이라는 생물학적 주장에 주눅들기 싫지만, ‘레 미제라블’의 마리위스에서 노추한 김지하로 변한 얼굴은 도처에 가득하다. 우습게도 우린 동창회 때마다 “어쩜 그렇게들 똑같니, 변하지도 않아!”라고 깔깔댄다. 실은 그 주책에 속는 건 우리 자신뿐이다.

민규동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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