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1.21 19:31
수정 : 2013.01.21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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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범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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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한국사회] 입사시험 / 임범
누구든 시험에서 떨어지면 기분 나쁠 거다. 나도 그런 일이 제법 있는데, 돌이켜보면 제일 기분 나빴던 건 면접시험에서 떨어졌을 때였다. 제대하고 기자 시험을 치르다가 몇 차례 면접에서 떨어졌다. 필기시험에서 떨어지면 ‘공부 더 하자’고 생각할 수 있다. 면접에서 떨어지니 뭘 더 준비해야 하는지 막막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사람의 인격이, 그것도 나쁘게 평가당한 것 같아 모욕감이 일기까지 했다.
1980년대 후반의 일이다. 그땐 대졸자들의 취직이 지금보다 훨씬 쉬웠다. 언론사 시험에 몇 차례 떨어진 친구들은 다른 회사에 들어갔고, 나도 진로를 바꿔야 하나 고민하던 막바지 <한겨레>에 합격했다. 한겨레의 시험 방식이 남달랐다. 채용할 인원만큼만 1, 2차 필기시험 성적으로 뽑았고, 면접은 통과의례였다. 언론사 입사에 청탁이 워낙 많아, 그럴 여지를 없애기 위해 필기 성적만으로 뽑기로 했다고 들었다.
1988년에 창간한 한겨레는 그 뒤로도 필기 성적만으로 기자를 뽑다가 90년대 중반부터 필요 인원보다 조금 더 많이 뽑아 면접에서 거르기 시작했다. 필기 성적만으론 유능한 기자의 자질을 파악하기에 부족하니 면접 점수를 반영하자는, 어쩌면 당연한 선택인데, 그러기까지 ‘저 언론사는 청탁 없이 공정하게 기자를 뽑을 거다’라는 신문사 안팎의 신뢰가 쌓일 시간이 필요했던 거였다. 실제로 입사제도가 바뀐 뒤에도 청탁받고 들어왔다고 의심받는 기자는 없었다. 그렇게 신중했던 선배들이 지금 더더욱 존경스럽다. 왜냐고?
얼마 전 이마트가 고위 공직자와 계열사 임직원 자녀들을 임원 추천 형식으로 채용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추천 입사’가 청탁 입사와 어떻게 다른지 잘 모르겠지만, 공정해 보이지는 않는다. 이 일 말고도 입사 청탁과 관련한 일화들이 최근 들어 많이 들린다. 한 자문회사가 고객회사 사장 자녀를 입사시켜 달라는 부탁을 받고 인터뷰한 뒤 거절했더니 그 고객회사가 계약을 끊었단다. 잘나가는 대기업의 한 부서에서 인원 절감이 필요해 줄이려고 보니, 모두가 고관대작이나 임직원 청탁으로 들어온 이들이어서 포기했단다. 하긴, 대기업 노조에서 장기 근속자 자녀 우선 채용을 단체협약으로 맺을 정도가 됐으니 앞에 든 사례들은 얘깃거리가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런 게 사회적 상상력인 모양이다. 어려움이 있는 곳에 비리가, 공정치 못함이 있음을 아는 것. 대졸자들의 취직이 쉬웠던 70~80년대엔 대학 입시의 공정함이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비리가 많던 시절이었음에도 입시부정은 엄하게 처벌했던 것 같다. 지금은 시대가 변했다. 대학을 나와도 취직이 힘들다. 그러니 대학입시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입사시험에서 룰의 공정함이 필요하지 않을까. 신문사 얘기로 시작한 김에 신문사를 예로 들어보자. ㄷ건설이 ㄱ신문사 경제부장의 아들을 청탁 입사(추천 입사?) 시켜줬고, ㄴ신문사 경제부장에겐 거액의 선물을 줬다 치자. ㄷ건설의 사활이 걸린 비리가 드러났을 때, 어느 신문에 기사가 더 제대로 실릴까. 청탁 입사는 사회의 공평무사함을 바닥에서부터 좀먹게 할 수 있다.
언론사 입사 준비생들에게 작문 강의를 몇 차례 했는데, 지난해 봄에 ‘봄’이라는 제시어를 주고 작문을 써보라고 했더니 하나같이 우울한 내용이었다. 대책 없이 캠퍼스를 떠나는 데서 오는 막막함, 자연의 봄은 왔는데 마음의 봄은 오지 않았다는 둥…. 지난겨울엔 ‘12월’이라는 제시어를 줬다가 이내 후회했다. 한 해를 돌이키는 그 우울한 표정들…. 취직에 목매고 좌절하는 젊은이들이 많은 지금, 공평무사한 사회, 시민의식이 살아 있는 사회를 가늠하는 제일 중요한 잣대는 투명하고 공정한 입사절차가 아닐까.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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