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2.18 19:28
수정 : 2013.02.18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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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범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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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목요일, 학원에서 언론사 입사시험 준비생들을 상대로 글쓰기 강의를 했다. 그날따라 결석한 이가 절반이 넘었다. 강의 마치고 술 마시기로, 전부터 약속한 터라 맥줏집으로 향했다. 수강생의 4분의 3이 여자인데, 강의 마치고 술자리까지 온 건, 남자 셋에 여자 둘이었고, 여자 둘이 먼저 자리를 떴다.
나도 모르게 이런 질문이 나왔다. “너넨 연애 안 해?” 한 명이 답했다. “안 하니까 지금 여기 있죠.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르세요?” 그랬다. 밸런타인데이였다. 남자 셋 다 20대 중·후반이었다. “젊을 때 연애 많이 하는 게 글 쓰는 데도 좋은데.” 다른 한 명이 말했다. “저희가 지금 자존감이 약할 때잖아요. 그러니 연애하기가….”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 20대 남자들 딱히 호감 갖고 본 기억이 오래전인데, 이날은 달랐다. 안쓰러워 보였고, 동지애까지 생기는 듯했다.
청년실업률 높은 시대에 취직 준비하는 20대 후반 남자들! 강의하면서 보면 똑같은 취업준비생임에도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더 주눅들어 있었다. 가부장 문화가 주는 부담이 클 거고, 군대 갔다 와서 여자들보다 나이도 많고, 그래서 자존감이 약하고, 돈도 없고…. 그런데 자존감이 약해지면 연애를 못하나? 자존감과 연애를 곧바로 연결짓는 게 옛날 남자식 발상 아닌가.
외국은 어떨까. 지난해에 나온, 미국 여자가 쓴 <남자의 종말>이라는 책을 봤더니 거기도 비슷한 모양이었다. 요즘 미국의 젊은 남자들은 과도기에 놓여 있다고 했다. 가부장적인 백인 남자가 이제는 웃음거리에 불과하다는 걸 알지만, 권력과 영향력이 빠져나가는 게 두려워서 그런 걸 등지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여자들이 유능해져서 ‘가부장’ 사회에서 ‘가모장’ 사회로 이행하고 있다고 말한다. 전엔 몸집과 체력 때문에 여자가 남자에게 밀렸지만 후기 산업사회는 사회지능, 열린 의사소통, 유연함 같은 걸 중시하는데 이건 여자들이 더 잘한다. 이런 변화는 남녀의 연애에도 영향을 끼친다. 여자들이 공부하고 일하기에 바빠지다 보니 연애는 시간 빼앗기는 일이 됐다는 것이다.
한 조사 결과 미국의 여대생들이 ‘남자와 사귀려고 애쓰기보다 사귀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면서 연구원의 말을 인용한다. “야심 찬 여자들은 관계를 맺는 게 4학점짜리 수업을 듣는 것과 같다고 계산하고, 차라리 훅업(일회성 성행위)을 택하는 겁니다.” ‘훅업’까지는 몰라도, 저자는 한국도 상황이 비슷하다고 본다. 요즘 한국 남자를 위협하는 건, ‘본인이 공부하느라 워낙 바빠서 남자를 꾀어내지 않는 여자, 몇 년 뒤 스스로 고급 핸드백을 살 수 있기 때문에 남자의 돈이 필요 없는 여자’라는 것이다. “한국을 비롯한 여러 아시아 국가에서, 변화하는 여성과 변함없는 남성은 서로를 살펴보고는 상대가 인생의 동반자로 완전히 부적합하다고 여기는 바람에 아시아는 ‘짝 없는 외기러기들’로 가득하게 되었다.”
“여성지배적인 사회라고 해서 부드럽고 여성스러운 유토피아로 변하라는 법은 없다”, “자연적 질서 따위는 없고, 오로지 현상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하는 이 책의 예측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옛날 남자식 자존감 같은 것 따지지 말고, 콤플렉스 느끼지 말고, 상대방이 자기보다 잘날 수도 있는 거고, 상대가 돈을 낼 수도 있는 거고, 그런 유연한 마음으로 연애해라, 그게 ‘남자의 종말’ 시대에 살아남을 미래형 남자이기도 하다, 그런 말이 되지 않을까. 그런데 그게 쉬울까.
아무튼 시대가 바뀌고 있는 건 분명해 보이니, 멋지고 새로운 미래의 남자상을 만들어내는 것 역시 지금 찌질해 보이는 20대 남자들의 몫일 거다.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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