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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6.10 19:35 수정 : 2013.06.10 19:35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주연의 <위대한 개츠비>(바즈 루어먼 감독)를 봤다. 매체들의 평이 그다지 좋지 않아서 기대가 낮아졌던 걸까. 생각보다 재밌었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파티장면, 컴퓨터그래픽으로 떡칠해 재현한 1920년 뉴욕 풍경은 물론, 영화 내내 흐르는 내레이션까지, 이 감독의 특징인 듯한 과잉이 곳곳에 넘쳐나는데 그게 밉지 않았다. 이야기도 물 흐르듯 흘렀고, 몇몇 대목에서의 인물 묘사나 대사 처리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럼에도 보고 난 뒤에 잔상이 오래가지 않았다.

로버트 레드퍼드 주연의 <위대한 개츠비>(잭 클레이턴 감독)를 다시 봤다. 1974년작, 그러니까 40년 전 영화다. 워낙 오래전에 봐서 희미하지만 섬뜩한 기억이 하나 남아 있었다. 이런 거다. ‘있는 집 사람들, 특히 있는 집 여자, 무서워!’ 다시 보니 묘했다. 음악만 빼면, 1974년 버전이 2013년 버전보다 더 요즘 영화 같았다. 우선 1974년 것은 내레이션과 플래시백이 없다. 당연히 생략과 점프가 생기고, 그만큼 보는 이를 긴장하게 했다. 2013년 것은 내레이션과 플래시백으로 지나치게 친절하다 싶을 만큼 다 설명해줬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2013년 영화가 시대적 특수성이 약해 보이기 때문인 것 같다.

두 영화 모두 줄거리는 같다. 하류사회에서 발버둥쳐서 상류사회로 진입한 개츠비가 전에 사랑했던 부잣집 여자 데이지를 다시 차지하려고 애쓰다가 결국 파멸한다. 아메리칸드림의 허실과 미국 상류사회의 부박함에 대한 풍자인 동시에 <태양은 가득히>처럼 부자 계급으로의 진입장벽이 얼마나 두꺼운지를 역설적으로 폭로하는 텍스트이기도 하다. <태양은 가득히>가 몇 차례 리메이크됐듯, 이런 텍스트는 특정 시대의 분위기를 덧입히거나 아예 무대를 바꿔 다시 만들 만큼 흥미로운 것이기도 하다. 한 사회의 상류층, 기득권층이 낯선 이의 진입을 어떤 식으로 차단하는지, 연애와 결혼을 둘러싼 제도와 풍습이 그걸 어떻게 돕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동서고금의 관심사 아니었던가.

1974년 영화의 로버트 레드퍼드에게선 고지식하고 완고한 옛날 남자의 냄새(최소한 1970년대까지는 유효했던)가 난다. 데이지를 사랑하지만 데이지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다. 고통과 고독을 견뎌내는 내성이 있어 보인다. 그에게 데이지는 그가 추구하는 가치의 전부일지는 몰라도 삶의 전부는 아닌 것 같다. 2013년 영화의 디캐프리오에게 데이지는 삶의 전부인 것처럼 보인다. 데이지가 없으면 못 살 것 같다. 당연히 데이지에게 해주는 것, 퍼주는 것도 훨씬 많다. 낭만으로 가득 찬 소년에 가까워 보인다. 요즘 남자가 이런가? 내 눈엔 어느 시대 남자인지 불분명하게 다가왔다. 내가 시대착오적인 건가?

개츠비가 이렇다 보니 텍스트의 느낌이 미세하게 달라진다. 레드퍼드의 삶은 아슬아슬한 게임 같은데, 디캐프리오의 삶은 숙명 같다. 자연스럽게 2013년 것은 상류사회에 진입하려고 애쓰던 남자의 비극에서, 여자를 얻기 위해 발버둥친 한 남자의 순애보 쪽으로 살짝 이동한다. 영화에 나오는 부유층의 모습도 다르다. 1974년 영화는 20세기 미국 부르주아 사회의 졸렬함, 이기심, 도덕적 타락을 들춘다. 그게 2013년 것에선 어느 시대건 존재하는 부유층의 보편적인 쾌락 추구와 타락, 도덕과의 타협으로 비친다. 어느 게 더 좋으냐 이전에 태도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시대의 구체성에 대한 언급 대신에, 사랑, 가난, 계급, 죄와 구원 같은 이야기의 원형질적인 요소를 부각시키는 데에 집중한다. 동시대에 대한 궁금증이 약해진 건가. 아니면, 두 개츠비 사이의 40년 동안 계급사회의 견고함이 불변의 진리가 돼버린 걸까.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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