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6.17 19:25
수정 : 2013.06.17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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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권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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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가 5대 국정목표 중에서도 특히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게 이른바 ‘창조경제’다. 이름부터가 엄청난 논란거리였던 ‘미래창조과학부’도 창조경제와 모종의 관련이 있어 보인다. 사실 근본주의 성향의 개신교계 일각에서 오랫동안 자신의 도그마를 수호하기 위해 사용해온 ‘창조과학’이란 용어를 (글자 배열상의 우연이라 할지라도) 굳이 정부 부처명에 끼워 넣은 것부터가 상식을 뛰어넘는 일이었다. 뭐 그건 그렇다 치자. 선출된 권력이 ‘창조’라는 말을 그렇게까지 좋아하니 어쩌겠는가. 백번 양보해 수사학적 취향의 문제라 여길 수도 있다.
가장 심각한 건 단어가 아니라 내용이다. 도대체 창조경제라는 것이 무엇인지 시민들이 아무리 용을 써도 알아낼 수 없다는 게 문제다. 정부는 틈날 때마다 창조경제 설명회라는 걸 여는데, 그럴 때마다 창조경제의 의미는 더더욱 ‘차원 저편의 세계’로 날아가 버린다. 예컨대 지난 4월 청와대가 공개한 ‘창조경제 개념도’가 그랬다. 청와대 트위터 계정은 “창조경제의 개념,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지셨나요? 꽃의 탄생 과정으로 비유한 인포그래픽스를 봐주세요”라고 운을 띄웠다. 개념도에 나온 씨앗은 창의성, 토양은 규제 합리화를 의미하고 산업과 산업 그리고 산업과 문화라는 융합을 통해 창조경제라는 꽃이 피어난다고 한다. 창조경제 결과물로 내세운 내비게이션은 ‘아이디어, GPS, 지도’의 융합, 스크린 골프는 ‘아이디어와 기존 과학기술’의 융합, 스마트폰 메신저는 ‘아이디어와 정보통신기술’의 융합이라고 한다.
이참에 청와대는 오해를 풀어야 한다. 절대다수의 한국인이 창조경제를 “이해할 수 없다” 말하는 건 “개념이 복잡하고 어려워서”가 아니다. ‘잘할 수 있는 거 잘하자’ 이상의 어떤 설득의 논리도 없는 걸 가지고 뭔가 심오한 내용이 있다고 우기니까 그 황망함을 최대한 점잖게 표현한 것이다. 창조경제를 처음 접한 미국인의 경우 이런 ‘동양적 에두름’ 없이 곧장 막말이었다. “허튼소리(Bullshit)!” 2011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토머스 사전트 교수가 최근 사석에서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 설명을 매우 구체적으로 듣고 난 다음 처음 뱉은 일성이라고 한다.
멍청한 관제 캠페인을 지켜보는 일은 괴롭지만 묘하게 낯설지 않다. 김대중 정부 당시 제2건국추진위원회가 대대적으로 벌였던 ‘신지식인 운동’은 “짜장면 배달원, 청소부, 운동선수, 회사원 등 누구나 지식인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신지식인론이 주는 메시지는 결국 이런 것이다. 이제 필요한 지식인은 옳고 그름을 논리적·윤리적으로 따지는 지식인이 아니라 “기존의 사고와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발상으로 업무를 혁신해 부가가치를 극대화시키는 사람”이라는 것. 김대중 정부가 정보통신 산업에 ‘닥치고 투자’한 일은 오늘날 대체로 좋게 평가받는다. 반면 신지식인 운동은 개념상 문제를 차치하고 ‘투입 대비 산출’이란 면에서만 봐도 확실히 실패한 캠페인이었다. 추진 당시에도 “과거 군부독재 시기 정부 주도의 의식개혁운동과 다를 바 없”으며 “개인의 창의성과 주체성을 사회문화적 인프라의 성숙이 아니라 국민 동원 캠페인으로 끌어낼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형용모순”이라 비판받은 바 있다.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론은 15년 전 신지식인 운동의 ‘열화복제판’에 가깝다. 신지식인 운동은 공허하나마 지식기반경제론이라는 이론적 배경과 최소한의 정당화 논리라도 있었다. 창조경제론은 아예 평가할 내용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한 정권의 국정 철학이 계속 조롱과 경멸의 대상으로만 남는 건 정권 자신은 물론이고 사회 전체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부디 국민에게 논쟁과 비판의 기회를 달라.
박권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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