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2.30 18:32
수정 : 2013.12.30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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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권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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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노조 지도부를 체포한다며 수색영장도 없이 침입해 건물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노조 사무실에 있던 커피믹스까지 훔쳐 갔다. 노조 지도부를 잡지도 못했는데 이틀 뒤 경찰 지휘부는 줄줄이 승진했다. 파업이 시작되자마자 코레일(한국철도공사)은 어떤 협상의 제스처도 없이 참가자 7800여명을 직위해제하며 사태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갔다. 12월27일 밤, 국토부는 어떤 사전예고나 중간보고 없이 수서발 케이티엑스(KTX) 법인 면허를 날치기로 발급했다. 단언컨대 내 2종 오토 면허도 이렇게 빨리 나오진 않았더랬다. 돌아보면 박근혜 정권의 1년은, 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우울한 비관론자의 상상조차 아득히 뛰어넘는 충격과 경악의 나날들이었다.
대통령의 첫 미국 방문 때부터 대형 사고가 터졌다. 바로 그 ‘윤창중 성추행’ 사건이다. 청와대 첫 대변인으로 윤씨가 뽑혔을 때 언론계 사정을 잘 아는 많은 이들이 “어처구니없는 인선”이라 비판한 바 있다. 그리고 석달도 지나지 않아 윤씨는 한 명의 인간이 ‘국격’을 얼마나 추락시킬 수 있는지 보여줬다. 그때만 해도 이것보다 큰 폭탄이 터질 거라 예상한 이는 거의 없었다. 얼마나 당치 않은 착각이었는지는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다.
‘국정원 게이트’는 경천동지할 스캔들이었다. 정보기관과 군이 일반 시민으로 위장한 채 조직적으로, 그것도 특정 정치세력에 편향된 댓글로 여론조작을 시도해왔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중대한 범죄 행위다. 박근혜 정권은 그러나 “대선 결과에 불복하는 것이냐?”는 말만 반복하며 진상 규명을 바라는 시민들의 요구를 무시하거나 회피했다. 한편으로는 내란음모 사건 등으로 공안정국을 조성하며 ‘종북몰이’에 열을 올렸다. 종교계는 이미 정권퇴진 운동에 돌입했다.
선거 당시의 복지공약은 대부분 휴지 조각이 됐다. 경제만 놓고 봐도 디플레이션에 대응하지 못했고, ‘한국 경제 최대의 뇌관’이라 불리는 가계부채 현황은 어느 때보다 위험천만하다. 전통적으로 우파 정부의 장기라 할 외교·안보는 어떨까. 지금 동북아시아는 그야말로 ‘전쟁 직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살얼음판이다. 그럼에도 박근혜 정권의 외교 라인은 전혀 존재감이 없다. 대북 관계는 말할 나위 없이 최악인 상태다. 1년 전과 지금을 놓고 봤을 때 박근혜 정부에서 진보한 분야는 단 하나, 대통령의 패션뿐이다.
사실 대통령에게는 이런 상황을 초래하지 않을 수많은 기회들이 있었다. 국정원 댓글 건만 해도 그렇다. 전임 정권 때 일어났던 문제라고 확실히 선을 긋고 정리했다면 오히려 조기에 부담을 털고 갈 수도 있었는데 굳이 이명박 정권과 ‘한배’를 탔다. 다른 사안에서도 여우처럼 교활하게 움직이기보다 갈등을 더 크게 부추기고 사람들이 정서적으로 반발하게 만드는 방식을 택했다. 이제 대통령의 ‘폭주’는 같은 편이 옹호해주기 어려운 지경으로 ‘막가고’ 있다. 친박계로 분류되는 유승민 의원이 케이티엑스 자회사 설립을 두고 “완전히 잘못된 정책”이라 강하게 비판했을 정도.
민주당 및 야권의 철저한 무기력, 종합편성채널을 비롯한 주류 매체가 정권의 스피커가 된 참담한 언론 환경, 영하 10도에 육박하는 추위, 2만에 달하는 경찰력과 차벽이라는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무려 10만의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철도 민영화 반대” “박근혜 정권 퇴진”을 외쳤다. 한국처럼 노조 조직률이 낮은 ‘노동 억압의 사회’에서 이렇게 많은 시민이 민주노총 총파업에 어깨를 겯는 일은 사실 기적 같은 사건이다. 어쩔 수 없이 식상한 가설 하나를 꺼내들게 된다. ‘박근혜 요정설’. 박근혜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시민연대의 정신을 두들겨 깨우기 위해 한국 사회에 벼락처럼 강림한 요정이 아닐까?
박권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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